환상 과학 소설 천년 女皇 (하) - 박경범 저 ----- 차 례 ----- <작가 소개> (12) 새 땅을 찾아 東으로 (13) 일사람들의 반란 (14) 理想國의 봄 - 제 3 부 - (15) 백성 위한 삶 (16) 學部大臣 아림 (17) 새라와 영화 (18) 아림의 情分 (19) 超女의 恨 (20) 女皇의 落淚 作者 後記 <작가 소개> 박경범 서울 아현동 출생. 서울대학교 졸업 후 정보통신 관련 연구기관, 대기업 등에 근무했다. 컴퓨터를 통한 인간의 문화생활의 향상에 뜻을 두어, 국내 최초로 음성, 음악, 그림 그리고 시(詩)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컴퓨터 소리시집>을 기획 개발하여 발표했다. 그리고 연구기관 재직 때의 경험을 토대로 컴퓨터에 의한 음성정보처리기법을 국내 최초로 우리말 용어를 사용하여 쓴 전문 기술서적 <선형예측분석법에 의한 음성의 압축과 재생>을 저술했다. 학생 때부터 원고지, 편지지 등에 틈틈이 자신의 글을 써 오다가 94년부터 하이텔(muma)과 천리안(kbpark)에서 문예활동을 시작하여 여러 단편소설과 수필을 발표했다. 95년 전반기 하이텔 이용자 문학상에 단편 과학소설 <외계인 X>가 당선되어 이제까지는 없던 전혀 새로운 경향의 문학을 선보였다. (12) 새 땅을 찾아 東으로 귀순마야희고의 일행이 다시 새 땅을 찾아 길을 떠날 때에는 아직 그녀는 긴 여정 동안에 쌓인 피로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앞장서 길을 인도하며 찬바람을 쏘이면서 이들과 함께 해 온 그녀의 피부는 거칠어졌고 햇볕에도 상당히 그을려 있었다. 머리칼은 칙칙하게 퇴색되었고 눈동자는 거슴츠레한 빛을 띠었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거칠고 강한 야성녀의 매력을 준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애써 미화시키려는 표현이고 사실은 고된 역정(歷程)에 찌들은 모습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대장군 노라는 여지껏 흠모하며 섬겨왔던 황세녀가 다시 기약 없는 길을 떠남에 못내 안쓰러워하며 몇몇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따라 나섰다. 나머지는 먼저 이야기한 대로 어린 사람들뿐이었다. "키션 황세녀 전하. 편안히 차내에 계세요. 저희들이 알아서 길을 인도하겠어요." 노라는 귀순에게 이렇게 말하고 자신이 대열을 이끌겠다고 했다. 얼굴의 윤곽은 소녀의 그것이지만 자세히 보면 노안(老顔)의 모습이 드러났다. 귀순은 여황용 안락수레의 차내에 남아 쉬면서 가게 되었다. 노라와 다른 일사람들은 자신들의 판단으로 새 땅을 찾아 계속 나아갔다. 귀순도 더이상 밖으로 나가 인도할 기력이 나질 않아 그대로 안에서 그들을 믿고 쉬었다. 그들은 따뜻한 남쪽의 초원을 놔두고 계속 동쪽으로만 향했다. 남쪽은 이전에 남방원정을 갔던 나라들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어떤 특별한 경계를 찾지 못하면 계속해서 이 곳은 결국 소냐 프레이아키에프 1세의 영토가 될 수밖에 없는 땅이다. 더 멀리 나아가 국경이 될 만한 곳을 지나야 한다. 가도가도 끝없는 평원을 그들은 무작정 달렸다. 이제 비로소 쉬게 된 귀순에게 그들은 새로이 몸단장을 해 주었다. 몸이 청결을 유지하도록 자주 씻겨 주면서 보다 빨리 고운 피부를 되찾도록 거칠게 부르튼 몸에다 약을 발라주었다. 그런데 떠날 때 가지고 왔던 그녀의 옷들은 이제 3미터 가까이 자란 그녀의 몸에 맞지를 않았다. 게다가 거의 모두 헤져 버려 더이상 쓸모가 없었다. 귀순은 이러한 옷들을 모두 벗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장에 다른 옷이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제는 여황족의 성년이 되어 가는 그녀의 몸안에서는 자체방출열(自體放出熱)이 오르고 있었고 또한 몸 전체의 완벽한 곡면화를 이루게 하는 풍부한 피하지방층은 바깥공기에 크게 구애됨이 없이 체온유지를 가능하게 했으므로 추위를 막기 위한 옷은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았다. 다만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옷이 필요했으므로 그녀는 가지고 있는 재료로 스스로 길쌈해 자신의 새 옷을 만들어 나갔다. 당분간은 그녀는 옷을 전혀 입지 않은 채로 여황전용안락수레 안에서 몸을 사리며 꼭 만나야 할 사람만 만나며 지낼 수 밖에 없었다. 때로는 폐허가 된 선천인간들의 유적이 널려있는 황량한 벌판을 지나가기도 하며 근 일 년여를 여행자의 생활을 하던 이들 앞에 멀리서부터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산맥이었다, 가로로 널리 퍼져 있어서 돌아나갈 곳이 없었다. "저 앞에 크게 펼쳐진 산맥이 보이네." "됐어. 저 산맥을 넘으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의 영토로 삼을 수 있을 땅이 펼쳐질 거야. 자 가자." 선두의 일사람들은 말하면서 이 곳을 넘기로 작정했다. 그리고는 귀순에게도 보고했다. "전하, 기뻐하십시오. 이제 이 산맥을 넘으면 이곳을 국경으로 그 다음부터는 모두 우리의 땅입니다." 귀순은 보고를 듣고 그다지 크게 기뻐하지는 않고 조용히 미소지으며 "그래요, 우선 우리가 무사히 잘 넘어가야지요." 했다. 모두는 산맥을 넘기 시작했다. 산과 산, 봉(峯)과 봉 사이를 요리조리 돌아 나가면서 전진했다. 그들이 탄 차들은 원거리 장기간 이동을 위한 다방향쌍무한궤도차(多方向雙無限軌道車 : Multi-Dirctional Twin Caterpillar Car)들로서 이 차는 두 개의 캐터필러가 비행접시모양의 차체 밑에 달려 있고 각각은 360도 회전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느 방향으로라도 자유롭게 방향을 바꾸며 험한 지형을 넘나들 수 있다. 여황용 안락수레는 다른 차들보다 길고 우아한 유선형의 차체에 화려한 꽃무늬장식이 그려 있는 것이 다르다. 이렇게 산악을 달리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자동차들이라 산을 넘기에 그렇게 큰 장애는 받지 않았다. 게다가 노라는 이전에도 군대를 이끌고 남방의 땅에 상륙해 이보다 더 험준한 산맥을 수차례 넘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전진에 그다지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그 때에는 가뿐한 전차를 몰고 넘었지만 지금은 많은 짐이 실려있는 탐험 및 이동 생활차라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산맥을 거의 넘어와 이제 넘어야 할 산이 한 둘 정도 남았다 할 무렵에, 모두가 산너머 저쪽의 무엇을 기대하며 쉬임없이 전진하던 중 갑자기 진행이 멈추어졌다. 선도차(先導車)가 가다가 계곡의 바위에 몸체의 중앙이 걸리어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앞뒤의 궤도바퀴는 헛돌기만 해서 아무리 차를 빼내려 해도 빼지지가 않았다. 물론 이러한 일은 먼저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귀순이 나서서 거뜬히 차를 들어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어려움 없이 계속 나아갈 수 있었다. 일사람 여럿이 힘을 합해서 들어올리려 한 들 잘 되지도 않았고, 들어올려 봐야 바윗돌을 치울 수 있을 만큼 올릴 수도 없었다. 한참 전진이 안되고 있고 바깥이 시끄러워지자 귀순은 일어나 밖을 살폈다. "무엇 때문에 지체하고 있니?. 갈 길은 너무나 멀지 않아?." "전하. 선도차가 바위에 걸려 도저히 빼낼 수가 없게됐어요. 어떡하죠?. 아무래도..." 더이상 이들이 아무리 힘을 합해도 안 된다. 귀순의 요즘의 상태는 안락수레의 밖으로 나오는 것만도 심히 부끄러운 상황이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귀순은 모두들 좀 멀리 물러서라고 하고 삼가며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귀순은 차의 앞으로 피하듯이 가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차의 앞부분을 잡아 가만히 들어내었다. 곧 차는 가볍게 올려져 바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모여서 지켜보던 얼마 안되는 수의 그녀의 범인족 백성들은 환호했다. "키션 황세녀 전하 만세." 물론 귀순의 이러한 역할은 이전에 평원에 도착하기까지의 여러 역정 중에서는 다반사였다. 그러나 그 기간 중에는 그녀는 그녀의 언니를 생각해서 절대 자신을 찬사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었다. 그런데 차를 들어 가만히 옆으로 비껴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귀순은 갑자기 눈앞이 어지러워지며 몸속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이 느껴졌다. "아아아아아..." "첨벙." 귀순은 이내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그대로 개울물에 빠지며 쓰러지고 말았다. "아앗. 전하!" 황급히 몇 사람이 달려들어 귀순을 끌어내려 했으나 장수 몇 명은 이미 늙은이들이라 스스로는 큰 힘을 쓰지 못했다. 나머지 모두들도 어린아이들 뿐이라 힘도 없을 뿐더러 합심해서 일하도록 통제도 되지를 않아 도저히 귀순의 몸을 끌어낼 수가 없었다. 단지 그녀의 어깨 위 상체만을 들어올려 받쳐줌으로써 얼굴을 물밖에 내놓게 하고 나서는, 어서 깨어나기를 바라며 가능한 모든 응급조치를 하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차가운 물 때문인지 귀순은 오래지 않아 깨어났다. 깨어나고서는 자신이 알몸 그대로 어린이들을 포함한 이 여러 자신의 백성들 앞에 한동안 흐트러진 자세로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자 그녀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그러나 물에 흠뻑 빠져 온통 젖은 얼굴이 발그레 상기된 모습은 모처럼, 그녀의 모습이 여전히 아름답다는 것을 재확인 시켜주는 광경이었다. 화끈 달아오른 두 뺨의 열에 의해 증발되는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그녀의 얼굴을 온통 휘감았다. 그녀 자신도 그리도 부끄러워하는 와중에서도, 물에 비친 자기의 어여쁜 모습에 어느 정도 자신감과 용기를 되찾은 듯, 회분홍빛 입가엔 사알짝 미소가 감돌았다. 때마침 물가 여기저기에 널려 피어있는 볼품없는 모양새의 이름 모를 여름 산꽃들도 그녀와 함께 하니, 장미백합(薔薇百合)이라면 도리어 그녀의 장미(壯美)에 눌리어 초라했을지언정, 더할 데 없이 화려하게 어울리는 장식화(裝飾花)로 그녀의 주위에 수놓아져 있었다. 하지만 귀순은 제 정신을 다시 찾자 누가 더 볼세라 얼른 일어나 자기의 자리로 바삐 뛰어들어와 누웠다. 이 날의 모습은 귀순이 달음박질치는 모습으로는 마지막이었다. 노라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귀순에게 말했다. "전하. 앞으로 험한 지형은 통과하기 어렵겠어요. 앞으로는 오래 걸리더라도 이런 지형들을 피해 나가야 될 것 같아요." 귀순은 일동에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내가 그 동안 모든 지질과학 관련 자료를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더이상 동방으로 가는 길에는 험한 산맥이 없을 것으로 알거든. 단지 동쪽으로 갈수록 더욱 더 추운 벌판만 나올 거야. 땅만 넓지 사람이 살 곳은 못된단다. 이제는 이전에 우리가 살던 곳에서 동쪽으로 많이 벗어났어. 가는 방향을 조금 남동쪽으로 해도 좋을 거야." 귀순이 방금 당한 일은 사실 그녀 자신에게나 그녀를 따르는 모두에게나 충격적인 일이고 많은 우려를 가지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내색 않고 계속 웃는 낯으로 이들을 안심시키며 새나라 건설을 위한 여행을 독려했다. 과연 이제는 그렇게 험한 지형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들은 계속 동으로 동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생활해 나갔다. 떠나오면서 지니고 왔던 여러 생활 물자들이 모두 소모되자 새로운 환경에서의 삶의 방편이 요구되었다. 이들은 식량으로 가져온 가축을 이동과 함께 기르면서 유목민의 생활을 해 나갔다. 아무런 인간의 자취도 없는 거친 환경에서 외따로 모여있는 자들이 자급자족으로 살아나가기는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이런 중에서도 몇 년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어린 일사람들도 조금씩 자라나니 점차 짐이 덜어지고 힘의 보탬이 되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들의 계속되는 노력의 결과로 거친 벌판을 유랑하면서 나름대로의 삶의 방법도 터득되고, 시일의 지남에 따라 이러한 유목민의 삶이 모두들의 몸에 점차로 배어 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을 결코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의 삶의 방식으로는 취하고 싶지 않은 것이 그녀 귀순마야희고였다. 자신의 타고난 다정다감한 천성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기자신은 정의 부족함 속에 자라난 그녀는 아늑히 자신을 감싸주는 지형의 땅을 그녀의 새로운 보금자리로서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들판은 그녀에게는 마음의 안식을 가져다 줄 수 없었다. 헌데 가도가도 그녀의 안식처를 삼을 만한 땅은 좀처럼 나타나지를 않는 것이었다. 낮이 되면 태양은 뜨겁게 灼熱했다. 귀순의 모습은 이러한 변화된 기후에 맞추어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얼굴과 콧날의 윤곽은 좀 더 부드러워졌으며 머리칼 색은 진황색으로 짙어져 있었다. 눈빛은 어느 틈엔가 진녹색의 빛을 버리고 노란빛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변치 않는 것은 그녀의 어여쁜 자태였다. 동행자들 모두는 달라진 환경에 따라 변하는 그녀의 모습에 신기해하면서 이제까지 모르던 새로운 미인의 형태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더구나 이제 서서히 성에 눈뜨기 시작하는 숫사람 아이들에게 귀순의 자태는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귀순이 뜨거운 햇볕을 피해 자신에게 마련된 거처에 들어가 쉬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몸소 다 짜놓고 평소에 걸치던 성긴 베옷도 뜨거운 한낮의 더위에 실내에서 걸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그녀는 가만히 옷을 벗고 거울 앞에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을 비쳐보며 하루가 다르게 자라며 달라져 가는 자신의 몸 곳곳을 신기한 듯 살폈다. 그러던 중 그녀는 거울 속의 생각지도 못했던 형상에 급히 놀라 몸이 와락 움츠려들며 비명을 질렀다. "어마! 깜짝이야." 거울에 비친 자기 몸의 뒤의 천막에 살짝 틈이 벌어져 있으며 그 틈으로 두 명의 숫사람 어린이의 얼굴이 귀순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자기들도 보자고 잡아당기며 승강이를 벌이는 다른 아이들도 있는 듯 했다. 그네들은 이렇게 때마다 기회만 있으면 귀순의 주위에 숨어 접근해 몰래 그녀의 모습을 엿보곤 해, 조용히 자신만의 사색에 잠기며 임의의 편한 자세로 있던 그녀를 화들짝 놀래키며 당황하게 만들곤 했다. 아직은 그들의 접근이 공식으로 허락되지가 않은 상태였다. 귀순의 나이나 그들의 나이나 공히 아직 성행위를 할 성년의 나이가 아니지 않는가. "네 이놈들 썩 가거라!" 귀순의 비명소리에 얼른 달려온 일사람들은 허락없이 그녀의 몸을 엿보는 자들을 곧 엄히 꾸짖어 쫓아냈다. 그러나 귀순은 놀라움과 수치감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연모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는 이네들에 대해 그 이상 모질게 조치할 수는 없었다. 동방원정 이전, 귀순의 고향이 위치한 곳 부근의 각 나라에서는 여황의 몸을 허락없이 훔쳐 본 숫사람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사형에 처하거나 눈을 멀게 하는 등으로 다스렸었다. 특히 지중해 연안의 바로 북쪽 산맥기슭에 자리잡았던 알프스여황국의 여황 라비니아 다이애나는 일사람들과 사냥놀이를 갔다 온 후에 자신이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았다는 이유로 다섯 명의 숫사람들을 즉결처형한 것으로 유명하다. 귀순의 몸 시중을 주로 하던 솔베이그가 말했다. "전하. 저들이 이렇게 제멋대로 전하의 주위에 숨어드는 것을 그대로 놔두어서는 저들을 통제하기가 참 힘들겠어요. 비록 숫사람들의 수가 부족해서 극형에 처하기는 어렵더라도 허락없이 전하의 몸을 엿보는 자는 눈을 멀게 함으로써라도 엄히 다스려야 하겠어요." 그러나 귀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며시 미소를 띄우면서 대답하기를 "그렇게 할 것까지는 없지 않겠니? 저들이 내 몸을 엿본다 해도 내게 해가 되는 것은 없잖니?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그리워해 생겨나는 일에 죄를 물을 수는 없는 거란다." 하는 것이었다. 귀순마야희고의 이 유례없는 자비와 덕성에 그들은 또 한번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서 이 어진 여황에 의한 새 이상국 건설의 날이 오기만을 그들은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3) 일사람들의 반란 귀순마야희고의 일행은 새 보금자리를 찾아 계속해서 동쪽으로 나아갔다. 가도가도 춥고 황량한 벌판은 계속되었다. 일행이 거친 환경에서의 유랑의 생활을 해 온 지도 십 년 가까이 흘렀다. 어느 덧 광활한 대륙 중부의 평원을 지나와, 그들 앞에는 완만한 산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골짜기마다에는 큰 물줄기들이 보였다. 앞장섰던 노라가 소리쳤다. "키션 황세녀 전하 큰 강이 보입니다! 사람이 살기에 좋은 땅인 듯 싶습니다!" 귀순도 이 말을 듣고 밖으로 나왔다. 과연 산지의 위에는 의외로 큰 물줄기의 강이 보였다. 물은 삶의 터전을 세우기에 필수 불가결이다. "그래, 이 강물줄기를 계속 따라가면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곳이 나타날 것 같아." 귀순과 일사람들은 강줄기를 따라 계속 나아가기로 했다. 모두는 경사면을 오르면서 전진했다. 갈수록 기후는 더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용기를 얻은 그들은 계속해서 그들이 머물만한 보다 아늑하고 포근한 땅을 찾아 따라 올라갔다. 마침내 그들은 앞에 커다란 물을 발견했다. 호수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끝은 안 보였다. 물은 지극히 맑고 투명해 물밑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기후는 이제까지 그들이 겪어온 어느 곳보다도 온화했다. "전하, 여기가 대륙의 끝인가 봐요. 기후도 좋고. 여기서 우리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노라와 대열을 이끄는 여러 일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그만 여기서 정착하고 살고 싶어했다. 그들도 단조롭고 긴긴 여행의 생활에 지친 것이었다. "아니, 조금만 더 가면 좋을 것 같은데..." 귀순이 말을 흘리자 일사람들은 다시 강조해 말했다. "전하, 보십시오. 이렇게 맑은 물이 한없이 펼쳐 있는데 이보다 더 좋은 곳을 어디 가서 찾겠습니까? 지금이 아직 얼음이 풀리지 않을 때인데 날씨도 우리의 고향처럼 한결 온화하지 않습니까?" "전하, 이제는 기나긴 여행도 지쳤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영토를 한 번 가져 봄이 어떠할지요?" 이들이 계속 이렇게 말하자 귀순은 "그래요. 일단 이 곳에 자리잡아 살아보도록 하지요." 하고 그들의 의견을 따라하기로 했다. 귀순은 이 곳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이상적인 환경은 아니었지만 모두를 고생시키는 것이 마음에 걸려 이 곳에 정착하자는 일사람들의 말에 따랐다. 그들은 곧 이 곳에 보다 장기적인 생활의 터전을 이루어 놓기 위한 일에 착수했다. 그러나 아직 건설을 위한 인력과 기술이 너무 부족해서 일단 천막으로 움집형태의 집을 짓고 살기로 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이제까지의 유목생활에서 기르던 가축을 이용하고 부족한 것은 주변 산에서의 사냥이나 물가에서의 고기잡이 등을 해서 충당했다. 밭을 일굴 만한 여건은 되지 않았지만 이제까지의 떠돌았던 삶에 비하면 한결 풍족해 진 것 같았다. 이들이 이곳에서의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되어 나가던 때에 노라는 귀순에게 말했다. "키션 황세녀 전하, 이제 이 곳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여 皇位에 오르십시오." 그녀의 말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격식을 갖춘 어조였다. "아직 그렇게 서두를 때가 아니지 않아요? 다음 세대를 이을 백성도 하나 낳지 못했는데." "이제는 우리 주위에는 아무 나라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만으로의 나라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아직은..." "전하, 저의 소원입니다. 더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이라니, 무슨 말이오?" "소신(小臣)의 기력이 날로 쇠하여지는 것이 느껴지옵니다. 소신의 생전에 키션 황세녀 전하의 등극을 보고자 소신은 원정길을 따라 나섰고 여지껏 기다려 온 것입니다." 귀순은 크게 당황했다. 그러면서도 이제 새 독립국의 설립은 더 늦출 수가 없었다. 드디어 귀순마야희고는 모황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공식 선언했다. 서북평원의 언니 소냐 프레이아키에프 1세의 라사여황국에 이어 호수의 모양을 따라 이름지어 바칼여황국을 창건하니 바로 북미희여황국 13대 여황 헤다 발키리아 즉위 490년이고 그녀가 모황의 곁을 떠나 새 창업을 위한 여행을 시작한지 15년이 되는 해였다. 이 해는 또한 라사여황국의 초대여황 소냐 프레이아키에프의 즉위 10년이 되는 해였다. 여황으로서 즉위하려면 응당 성대한 대관식을 가져야 할 것이나 아직 생활여건이 너무나 미비한 탓에 약식으로 거행되었다. 물가 조금 넓은 터를 골라 귀순은 배산(背山)하여 무릎 꿇고 앉았다. 그녀와 마주하여 범인족 일동이 모두 꿇어앉았다. 그리고는 서로 절을 올림으로써 군민(君民)의 연(緣)을 공식 확인했다. 그녀는 모든 백성들에게 두루 은혜를 베푼다는 뜻으로 연호(年號)를 광혜(廣惠)라 하고 이 곳 물가의 산기슭에 자신의 거처를 자리잡아 그녀의 새 생활을 시작했다. 귀순과 주위의 일사람들은 상의했다. "이제 이곳 물가에 터를 잡아 우리의 궁궐을 지어야 하겠지요." 한 사람이 말하자 곧 다른 사람이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지어야 하지요?" 귀순은 얘기하기를 "누가 좀 나서서 건설을 지도해 줄 사람 없을까요? 떠나올 적에 건축을 위한 모든 문헌을 가져오기는 했는데..." 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조금 머뭇거리다가는 모두들 "지금 저희들이 봐야 알지도 못해요." "언제 그걸 다 배워서 활용해요? 도저히 불가능해요." "우린 원정 다녀보기만 했지 책 보는 건 몰라요. 호홋" 하고는 귀순과 서로의 얼굴들만 빤히 쳐다보았다. 일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귀순마야희고를 따라온 일사람들은 모두 노라의 측근 군속(軍屬)들일 뿐이었다. 쓸만한 기술자들은 모두 저들의 안락한 삶을 위해 소냐의 라사여황국 건설당시 그 곳에 남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평원을 헤쳐 오면서 살아남기에만 급급했지 일사람들이 언제 자신들과 젊은 애들에게 기술교육을 익히게 할 겨를이 있었던가. 귀순은 이들에게 부담이 될까 해서 다시 말했다. "당장에는 그냥 이대로 천막을 쳐서 생활하도록 하지요." "폐하께서 불편하실 것 같은데요..." 일사람들은 빈말로나마 걱정스레 물었다. "그래도 할 수 없잖아요? " 귀순은 일단은 그네들의 부담을 덜기로 하고 그 동안 소중히 보관해 온 온갖 문헌서책을 훗날의 문명국 건설을 위해 차세대에게 교육시키기로 했다. 귀순은 일행의 전반적인 생활을 관리하는 페트라를 불렀다. "페트라, 훗날을 위해 어린 사람들에게는 건축술을 교육시키도록 하지요." 귀순은 말했다. "예... 한번 말해 보지요." 페트라는 대답하고 나갔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무슨 일을 도모하는 낌새가 없었다. "어떻게 되었어요? 요 옆에 크게 지은 천막에서 어린 사람들을 모아 기술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어요?" 귀순의 물음에 페트라는 옆머리를 조금 긁적이면서 "저희들도 아는 것이 하나 없는데 무얼 가르친단 말입니까?" "같이 보아가며 하면 되지 않아요? 내가 아는 것에 대해서는 직접 도와 줄 수도 있어요." "지금 당장 살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이 더 급합니다. 아이들도 도무지 모이지를 않습니다. 어떡하면 이 곳에서 사냥과 목축을 잘 해서 살아갈 방도를 터득하냐는 것이 모두에게 시급합니다." 귀순은 그들이 구해오는 식량으로 살아가는 입장이기도 했다. "그러면... 할 수 없지요. 좀 더 생활이 풍요해 진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밖에..." 일사람들은 이 곳에서 문헌을 참조해 보다 효율적인 건설이나 생산기술을 익히려고 하지를 않았다. 귀순도 굳이 그들에게 권해 정착도시를 건립하게 하려는 마음은 잘 나지를 않았다. 이러는 중에 그 동안 원정대를 이끌어오던 노라는 점점 더 쇠약해져서 일과를 보기가 어려워져 갔다. 이 곳에 자리잡은 이듬해 겨울 마침내 노라는 자리에 눕고 말았다. 갑자기 닥쳐온 추위에 호숫가가 온통 얼음과 눈에 덮인 날 밤 중앙의 움막에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노라는 애스터 등 수하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덕몽매(不德蒙昧)하였던 저가 없더라도 가여우신 우리 귀순 여황폐하를 제신(諸臣) 모두께 잘 부탁합니다." 모두들 침울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리에서 귀순은 소리질렀다. "언니! 더 살아야 해요. 이제 난 누굴 의지하고 살란 말이에요?" 극한 상황에 이르자 귀순의 말은 모든 격식을 떠난 혈육의 정으로부터 나오는 말이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그러나 소신의 생명이 이미 다 되었음을 느끼옵니다." 노라는 오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고토(孤土)의 호수에는 처연(凄然)한 겨울달빛이 어렸다. 호수면 어느 곳은 희멀겋게 반짝이고 어느 곳은 검푸르게 잔잔하다. 검푸르게 보이는 곳은 아직 얼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그 곳도 어느 덧 얼어붙을 것이다. "애스터, 그대가 앞으로 짐을 도와 이 나라의 기틀을 잡는데 힘써 주오." 눈물 젖은 얼굴로 귀순은 말했다. "폐하, 흑, 제가 어찌 그런 대임을 맡는단 말입니까." "지금 달리 어찌할 수가 없지 않아요? 그대를 의지하는 수밖에..." 노라의 뒤를 이어 애스터가 일사람들의 통솔을 맡았다. 그러나 그녀는 전임자 만치 아랫사람들을 잘 다루지를 못해 이들의 사회는 점차 기강이 흐트러져 가고 있었다. 게다가 계속되는 생활의 어려움으로 인해 이들은 힘들여 먹을 것을 구해오는 일을 하는 자기네들이 마땅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들 여기게 되었다. "이년들아! 폐하께 드릴 수라를 너희들이 먼저 다 먹어버리고 남는 걸로 가져오다니..." 애스터는 어느 날 사냥에서 돌아온 조(組)가 귀순에게 진상할 음식을 자기네들이 먹다 남은 걸로 가져오는 것을 보고 이들 젊은이들에게 버럭 화를 냈다. 그러나 그들은 낯빛 하나 변하는 것 없이 서로들 쳐다보며 말하기를 "쳇, 우리는 죽을 고생하며 잡아왔는데 우리가 먼저 먹어보는 건 당연한 것 아니에요?" "그래도 혹시 해로운 거 있을까봐 먼저 실험해 본 거라고요. 드시게 하세요. 저희들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후훗." "이거, 고생하는 사람 따로 있고 편히 앉아 누워 쉬기만 하는 사람 따로 있고 원 살맛이 나야 말이죠." 하며 슬금슬금 피해 갔다. 애스터는 아까보다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금은 타이르듯 "이년들아. 세상이치는 그게 아니단 말이다. 당장에 먹을 것 구해오는 것이 다가 아니란 말야." 했으나 그들은 전혀 귀담아 듣는 기색이 없었다. "굶어 봐요, 그런 얘기 나오나..." "어쨌든 내일 먹을 걱정 지금부터 해야겠어요. 이만..." 그들은 이렇듯 내뱉고는 안에서 이를 보고 있는 귀순은 본체만체 돌아서서 자기네들이 모여서 노는 곳으로 갔다. 비록 어수선한 가운데서나마 새로운 독립국을 세운 엄연한 여황인 귀순 마야희고 1세에게 젊은 일사람들은 마땅한 예를 보이는 경우가 드물어 졌다. 귀순의 식사를 돌봐주는 오제와 안네가 사냥조가 가져온 먹다 남은 고기를 가지고 귀순에게 상을 차려주었다. 애스터와 이들은 귀순의 앞에서 흐느꼈다. "폐하. 망극하여이다." 귀순은 이들을 위로했다. "괜찮아요. 그래도 먹을 만 한데요 뭘. 저들이 잘 먹고 기운을 써야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나 이들이 더욱 슬퍼하는 것은 바로 당장의 일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도 이미 노쇠해 자신들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스터는 귀순에게 대책을 건의했다. "폐하 어찌하오이까? 저희들도 이미 힘이 부침을 느끼옵니다." 귀순도 이제 막연하게 힘내라는 얘기는 소용없음을 알았다. "젊은 일사람들을 좀 가까이 데려다 일을 맡기세요." 이렇게 해서 젊은 일사람들에게도 일행의 살림을 책임지는 일을 조금씩 넘기기로 했다. 각자 맡은 일을 할 때마다 젊은 일사람들을 동행해서 일에 대한 모든 사항을 일러주고 같이 일의 본말(本末)을 관장(管掌)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그네들은 마지못해 따라 할 뿐 귀순을 보필해 제대로 된 나라의 기틀을 세우려는 마음은 도무지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어수선한 체제 속에 이곳에서의 생활은 계속되었다. 이들이 이 곳에 자리잡은 지는 오 년 가까이 지났다. 솔베이그와 젊은 일사람 두 명이 귀순을 물가에서 목욕시킬 때에 솔베이그가 머리를 빗질하고 있는 동안 둘은 귀순의 양다리 부분을 씻겨주는 일을 맡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 일을 맡은 젊은이들은 솔베이그의 눈을 피해서 딴전을 부리든가 그냥 호수 물을 귀순의 하체에 퍼붓기만 하든가 도무지 정성을 들이는 기미라고는 없었다. 귀순에게 살림의 형편을 보고하려고 오다가 이 광경을 본 애스터는 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년들아, 폐하를 그렇게 모시는 법이 어디 있느냐!" 애스터는 호통을 쳤다. 그리고는 "억..." 그녀는 곧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어머나, 대장군님." 깜짝 놀란 솔베이그가 그녀 앞에게로 와서 얼른 붙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귀순도 얼른 힘들게 다가와서는 "흑, 정신차려요. 우리 모두 그대를 바라고만 있는데..." 하며 흐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렇게 애스터도 점차로 와해되어만 가는 여황국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다 원장대장의 직을 받은 지 몇 해 못 가 역시 세상을 떠났다. 이 때 이미 페트라와 오제는 죽은 후 였다. 솔베이그는 원래부터 간호의 일만을 맡아왔던 여자이고 안네, 레기네 등도 이미 자기들의 몸도 가누기 힘들게 된 상태인데 다시 원정대장을 물려 임명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었다. 얼마 안되어 안네와 레기네가 죽었고 솔베이그도 죽었다. 이렇듯 애스터가 죽은 때를 전후해 두어 해 동안에 북미희여황국을 출발할 때에 이미 장년의 나이 이상이었던 솔베이그, 페트라, 오제, 안네, 레기네 등의 일사람들이 조금만 더 있어 달라는 귀순의 간절하고 처절한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하나 둘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그 생을 다하고 말았다. 오랜 기간 동안 거친 환경에서의 불안정한 생활 끝에 풀린 긴장은 이들의 생명을 더욱 재촉한 것 같았다. "으앙, 언니 죽지마, 흑흑." 귀순의 통곡소리는 호숫가 전체에 메아리쳐 졌다. "참. 저렇게 소리만 내서 무얼 한단 말이야?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었는데..." "저렇게 소리낼 힘으로 좀 돌아다녀서 먹을 것을 구해오는 힘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아있는 젊은 일사람들은 말했다. 어린 범인족들 중에서 오던 길에 병이나 사고로 죽은 자들이 이삼십 명이 되니 이제 불과 백수십 명의 사람들, 게다가 제대로 된 훈련과 교육을 받지 못한 자들만을 데리고 있는 그녀의 생활은 말이 건국이지 실상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유랑의 무리나 다를 바 없었다. 그 동안 가까이 의지하며 지내던 언니뻘의 일사람들이 하나 둘 모두 세상을 떠나 눈물이 마를 새 없던 그녀의 앞에는 한층 더 모진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응, 왜 이리 몸이 움직이기가 힘들지?" 귀순의 몸은 더욱 자라 이제는 웬만한 일상사들도 자기 스스로는 처리하기 힘들게 되었다. 식사, 화장, 그리고 온갖 여타의 용무까지도 점차로 일사람들의 잔손질이 더해져야만 가능하게 되었다. "여황폐하를 시중들 사람들을 늘려야 하겠어요. 대여섯 명 가지고는 안 돼요. 적어도 스무 명은 되어야 해요." 솔베이그를 도와 귀순의 몸시중을 했던 일사람들이 모두에게 말했다. 그네들의 입장에서는 좀 사람이 늘어야 자신들의 부담도 줄어들 것 같아서였다. 사냥과 목축의 고된 일과에 지친 일사람 열댓 명이 "그래요? 우리가 도와주기로 하지요." 하고 자원하여 귀순의 몸 시중의 일에 가담하기로 했다. 결국 일사람들의 그녀에 대한 부담은 더욱 커졌다.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전체로 보아도 불과 백 명이 못되는데 그 중 거의 사분의 일이 귀순을 위해 일해야 하므로 그만큼 그들의 생활을 위한 생산 활동은 줄어드는 것이다. 젊은 일사람들은 귀순의 마음과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 무언지를 잘 몰라서 시중을 들면서 일일이 그녀에게 물어보고 행동했다. "어떻게 해 줘야 돼요? 요기 말예요?" "응. 거...기... 조금 아래 좀 씻겨 줘."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그녀의 몸을 돌보는 일은 정말 피차에 곤혹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귀순은 먼저 언니뻘 되던 일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는 그나마 편하게 부탁할 수가 있었는데 사정을 모르고 이해심이 적은 젊은 일사람들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웠다. 한편 출발 때부터 지도역할을 했던 중신들이 모두 죽자 이들의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누가 새로운 지도자의 일을 맡을까요?" 솔베이그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 모인 자리에서 귀순은 이들에게 말했다. 이 때 "제가 맡겠습니다." 하고 나서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이전에부터 노라와 애스터의 곁에서 일을 도와오면서 중간 지도자의 경험을 그런 대로 쌓아온 엘레나라고 하는 26세의 일사람이었다. "고마와요, 이제까지는 원정대장을 승계하라고 하면 서로서로 안하려고만 했었는데 스스로 나서기도 해 주다니... 여러분 젊은 세대들에게 기대를 많이 할 수 있겠어요." 귀순은 반가웠다. 다른 나서는 이도 없고 엘레나는 이미 이전에도 젊은이들 중에서 두드러지게 일행의 살림을 앞장서 처리하곤 한 것이 모두에게 알려진 바 있었기에 그녀는 그대로 원정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엘레나가 일행의 살림을 관장한 뒤로 그다지 큰 탈은 없이 이들의 생활은 유지되어 나갔다. 어느 날 그녀는 동료 몇몇 일사람들과 함께 귀순의 앞에 모여 살림에 관한 회의를 하고 나서 "이제 원정대장이란 명칭은 맞지 않잖아요? 우리는 이제 이 곳을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데." 라고 귀순에게 말했다. "그래요 맞아요." 일사람들은 동의했다. 귀순은 묵묵부답 했다. "어떻게 생각하시죠?" 엘레나가 재차 묻자. "그냥 자네들이 정하세요. 난 그에 따를 테니깐..." 귀순은 그들에게 맡겼다. "그럼 저희들이 새로운 체제를 궁리하고 보고 드리기로 하지요." 엘레나는 주요 일사람 대여섯 명과 함께 귀순의 앞에서 물러나왔다. "저 건너편 물가에서 우리끼리 따로 회의를 해보자." 귀순의 앞으로부터 떠나간 뒤에 그들은 얼굴빛이 달라지면서 서로들 눈치를 보았다. 모두들 자리에 모여 앉자 그들 모두는 저마다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이미 이 때 젊은 세대 중에서는 체제에 대해서도 동요(動搖)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그들의 행동력을 그들 자신을 위해 씀으로써 자신들의 진정한 삶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아져 갔다. 엘레나 또한 이러한 이들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그녀의 대장임명 당시에도 귀순은 이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엘레나는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단순히 명칭만 바꾸는 게 아니라 이제 우리 세대에 맞는 새로운 사회체제를 꾸미는 것이 어떻겠니?" "맞아. 이젠 어떤 체제의 변화가 필요해." 그녀의 친구 리즈가 이에 맞장구를 쳤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이 최우선이야. 우리가 먹고 살 수 있는 물자를 생산하기 위한 일을 잘 이끌어나가는 사람이 우리의 우두머리가 돼야 해." 그녀의 또다른 친구가 이를 더욱 부추겼다. 이들의 표정을 읽은 엘레나는 다시 좌중을 둘러보고는 "일사람들은 활동 능력이 떨어지게 되면 때를 맞추어 세상을 떠나곤 하는데 여황은 활동능력은 점점 떨어지면서도 도리어 양식만 더 많이 소비하고 우리의 부담을 늘리고만 있다. 우리가 이렇게 고생해가며 여황을 모셔 보아야 얻어지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 이제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되찾아 실현하는 일에 매진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고 연설조의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갸름한 얼굴의 회색빛 두 눈은 이미 무언가의 야심을 품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이 말은 특히 귀순의 모든 용무를 보아주는 궂은 일을 맡아하고 있던 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사냥과 목축보다 편할 줄로만 알았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녀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등의 일은 오히려 더욱 힘들고 고되기만 한 것을 알았다. 그들은 이내 맞장구를 쳤다. "매일 해주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달마다 어김없이 피를 한 바가지씩 쏟는 거 치워주기도 고역이야. 그럴 때마다 왜 그리 까다롭게 심통은 부리는지 원." "그래요, 그녀에게 들이는 노동력을 부족한 우리의 생활물자 생산에 돌렸더라면 우리는 이렇게 어렵고 힘든 생활은 안 했을 것이에요." 엘레나는 앞의 말을 이어 단정적으로 이야기했다. "귀순은 그저 쓸데없이 화려하고 비효율적인 육체를 가진 무용지인(無用之人)에 불과하다. 그로 인해 생기는 부담을 우리가 우리의 자아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떠맡을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젊은 일사람들에게도 귀순은 이렇게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귀순에 대한 그들의 마음속의 경멸은 더해 가고 있었으며 그들의 귀순을 대하는 태도 또한 날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주인이 되는 새 체제를 건설하자." "그래, 진정 땀흘려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새 시대를 열자." "우리의 인생은 우리 자신의 것이지 남을 섬기려는 것이 아니다. 빼앗겼던 우리의 자아를 되찾자." 이들은 의기투합하여 엘레나를 지도자로 추대하고 일사람들의 새 사회를 이룩하자는 결의를 했다. 다음날 아침 귀순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잠을 깨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평소에는 아침부터 주위에 모여 귀순의 시중을 들 준비를 해야 할 일사람들이 보이질 않았다. "어마, 아무도 없잖아? 웬일일까?" 귀순은 곧 화장식을 해야 하는데 그녀 혼자서는 원활히 용무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수발을 들어주러 올 때는 부끄러워하던 귀순도 막상 그들이 보이지 않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순은 일사람들 중 생각나는 자들을 불렀다. "엘레나, 리즈 어디 있니? 좀 와줘." 한참 있다가 엘레나가 나타났다. 그녀는 귀순을 향해 "인제부터는 우리는 우리의 삶을 찾기로 했소. 당신의 문제는 당신 스스로 해결하시오." 하고 뻣뻣이 이야기했다. 귀순은 크게 당황했다. 그전부터 이들의 태도가 날로 불손해져 왔던 것은 느껴지는 바 였으나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귀순은 자신의 용무가 급함을 느꼈다. 더욱 당황한 낯빛으로 귀순은 얘기했다. "도와줘요. 제발." 조금 있다 리즈도 와 있었다. 그러나 그녀 또한 같이 멀거니 보기만 하면서 "안돼요. 이제 버릇을 달리해야 해요. 우리 인생은 우리가 제대로 찾아야 하겠소." "당신도 이제 당신의 일을 스스로 해결하시오." 라고 훈계조로 이야기했다. 스스로의 거동이 날로 더욱 불편해지고 있는 귀순은 이미 혼자 나가서 단 열 발짝을 걷기도 힘들었다. 급한 귀순은 혼자서 천막을 나와 물가를 향해 기어갔다. 그러나 다 가기 전에 이미 기운은 빠지고 몸은 불덩이같이 열이 났다. 더 움직이지 못하는 귀순은 그 자리에서 결국 생리작용을 더이상 막지 못하고 말았다. "으헝. 엄마야..."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귀순이 할 수 있는 것은 서러움에 통곡하는 것뿐이었다. 이미 일사람들 사이에서는 일체 그녀의 일상사를 돌보아주지 않기로 합의된 것이었다. 그녀의 울음소리에 부근의 모래흙이 휘날려 떠올라졌다. 그리고는 다시 바람에 날려 그녀의 얼굴 위에 뿌려졌다. 얼굴엔 눈물 젖은 흙탕물이 범벅이 되고 하체엔 또한 이물질이 범벅이 되어 처량하기 이를 데 없는 몰골의 귀순에게 서너 명의 숫사람들이 다가왔다. 이제 그들도 청소년기에 다다라 귀순의 여향에 적잖이 끌려 그전부터 그녀 주위를 기웃거려 왔었는데 그 동안은 일사람들이 귀순의 주변에 지키고 있어서 뜻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귀순은 이들에게서라도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얘들아 나 좀 도와줘. 응? 제발."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재미있다는 듯이 한동안 귀순의 곤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나 물 좀... 그리고 씻겨 줘. 안 그러면 죽을 것 같애." 범인족에게는 여황족에 관해 '죽는다' 얘기가 나오는 것은 본능적으로 공포감을 주는 것이다. "이크, 큰일났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낙으로 산담." 그들은 급히 주변에서 물그릇을 주워다가 물가에 가서 물을 퍼와 귀순에게 들이부었다. 그래서 그녀의 불덩이 같은 열을 조금 식히고 엉망이 된 하체부위를 조금 씻겨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손은 워낙 무뎌서 물을 부어 열을 식혀줄 줄 때에도 정말 필요한 목이나 어깨 등에는 붓지 못하고 엉뚱한 곳이나 맨바닥에다 버리기 일쑤고, 씻겨줄 때에는 더욱 그러하여 도대체 씻겨주는 것인지 그냥 물을 묻혀 문대주는 것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리고는 그녀의 음부의 부위에 다다라서는 더이상 다른 곳은 손대지도 않고 그대로 무작정의 작위적 마찰만을 거듭했다. 귀순은 그들에게 하소연했다. "하지 마아, 인제 그만..."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더 신이 난 듯 웃기만 하며 "재밌잖아요? 헤헤헤." 하며 그들의 손질을 쉬지 않았다. 이들의 제멋대로의 작태에 귀순의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조치도 안하고 그냥 놔두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으니 어쩌랴. 이제부터는 이들에게 미우나 고우나 의지할 수밖에는 없다. 제대로의 사회체제가 갖춰지지 않은 이 상황에서 이들 숫사람들은 일사람들로부터 빌어먹거나 극히 단순한 심부름들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날 이후로 귀순은 이들 사회의 일상에서 오히려 소외당하면서 마지못해 인정상 부양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일사람들은 자기네들끼리 귀순의 거처에 대해 상의했다. "귀순의 거처는 저쪽 구석의 움막으로 하게 하자." "그래 거기서 숫사람들과 같이 지내게 하면 돼. 지저분하고 냄새나니까 구석으로 몰아놔야지." 이렇게 합의하고는 귀순을 숫사람들과 같이 북쪽 변두리 음지에 있는 창고를 겸한 움막에 가서 살게 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모든 일상생활에 대해 더이상 마음써 돌보지 않았다. 다시 일사람들은 귀순의 할 일에 대해서도 의논했다. "저 여자도 살기는 살게 해 주어야 할 텐데 어떡하지? 그냥 놀고먹게 할 수도 없잖아? 먹는 것도 적지 않은데..." "이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을 골라 시키자. 그것의 돼 나가는 것을 보아 먹을 것을 주어야지. 사람은 어떤 형태의 사람이건 자기 밥값을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 그들이 낸 결론이었다. 여황국의 사회에서 '여자'라는 말은 여황족을 자기네 일사람들과 근본이 같다해 동격으로 취급하려는 것으로서 일부 저급한 일사람들이 자기네들끼리만 있을 때 쓰는 용어였다. 제대로 된 그들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이러한 말을 쓰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회의를 끝내고 나서 엘레나를 비롯한 권력주변의 일사람들은 귀순에게 찾아와 말했다. "당신은 이제 우수리 인생을 사는 것이니 우리 모두를 위해 일하며 사는 것이 어떻겠소?" 귀순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대응은 아무 것도 없다. 엘레나는 다시 귀순을 향해 물었다. "당신 할 수 있는 것이 뭐지?" "베 짜는 것을 하 할 수 있어요." 풀죽은 귀순은 대답했다. "그래요? 그건 익히 아는 바이니 내일부터 우리 전원을 위한 옷감을 만드는 일을 하기로 하시오. 비록 삼베가 아니라 짐승 가죽이라 입맛에는 안 맞는 일일지 모르지만 먹고 산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도 알아야 해.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있는 경우란 없는 것이란 말이오." 고개 숙인 채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귀순의 앞에서 발걸음을 왔다갔다 옮기면서 말하던 엘레나는 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귀순을 향해 똑바로 서서 고개를 치켜들어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당신이 소비하는 식량에 비해서는 그것만 가지고는 제값을 못하지..." "..." "조오기 우리 나라의 입구에는 사냥하고 잡아온 짐승과 땔감 등이 수북히 어지럽게 쌓여 있는데 그것들을 정리하고 우리가 잘 이용할 수 있게끔 해 주시오." 이렇게 해서 귀순은 옷감 만들기와 물건 정리하기 등의 일을 해야 했다. 옷감 만들기야 자신이 원래 즐겨 하기도 한 것이니 조금 일이 많아져도 그런 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물건 정리하기에 관해서는 달랐다. 귀순은 제대로 서서 일을 할 수도 없으니 어색한 자세로 일을 해야 하고 또 완전히 옷을 갖추어 입지도 못하는 자신이 바깥에 나와 그런 모양으로 모두에게 자꾸 노출되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귀순은 이제 일사람들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그녀에게 관심 가져 주는 건 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충만한 몇 명의 숫사람들뿐이었다. 귀순은 싫으나 좋으나 생활을 해나가려면 이들 숫사람들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곤혹스러운 것은 일부 숫사람들의 행동이었다. 특히나 악취미를 가진 자들은 귀순이 물건정리하는 일을 할 때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그녀의 몸 여기저기를 흘끔흘끔 기웃거렸다. 어떤 자는 수시로 다가와 제멋대로 그녀의 몸에 손을 대곤 했다. "이러지 마, 정 그러면 나중에 저녁에 쉴 때 그러면 되잖니?" 귀순이 타일러도 그들은 "저녁까지 어떻게 기다려요? 낮에 딴 할 일도 없는데, 헤헤." 하면서 계속 그녀의 주변을 서성댔다. 그러나 귀순은 이들의 행동을 달리 막을 길이 없었다. 그녀는 숫사람들의 희롱을 어쩔 수 없이 받아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에 대한 시중이 필요할 때에는 그들의 열등한 노동력으로부터의 봉사를 받아가며 살아가야 했다. 귀순은 이러한 형국에서는 절대로 아이를 낳을 수는 없기에 숫사람들의 희롱이 있을 때에는 자신의 음문을 철저히 닫아두어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했다. 어느 날에도 모처럼 오후의 여가를 얻어 자신의 천막에서 곤한 낮잠에 빠져있던 귀순에게 아니나 다를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숫사람 세 명이 들이닥쳤다. 그런데 이날 귀순의 하체부를 더듬고 있던 한 숫사람이 "이제 사정(射精)을 좀 해보자" 하며 귀순의 음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귀순의 음부의 힘은 실로 강력하여 도무지 열려지지를 않았다. 이러자 같이 악취미를 가진 옆의 또 한 자도 가담해 힘껏 귀순의 다리를 벌리고 음문을 열려고 했다. 귀순은 "안돼. 너희들 그것만은. 이 판국에 아이를 낳아봐야 기를 수도 없는데 무슨 끔찍한 일을 저지르려고 그래?" 하며 이들을 만류했다. 그러나 이들은 막무가내로 "에이, 우리도 그 동안 많이 참았어요." "원래 폐하와 우리는 이런 걸 하기로 되어 있는 거 아녜요?" 하며 더욱 달겨들었다. "정말 그만두지 못해? 지금 책임질 수도 없는데 어떡하란 말야?" 귀순은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역시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책임? 그거 말 뜻 우린 몰라요." 이들이 말을 듣지 않자 귀순은 손을 뻗어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음문을 열려 하는 자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목덜미를 움켜쥐어 당기니 그자는 그대로 끌려나왔다. "으아악." 숨이 멎고 가슴이 으스러지는 고통을 느낀 그자는 전에 없이 귀순에게 사정(事情)을 하고 용서를 빌었다. "다 다시는 안 그럴 테니 살려주십쇼." 귀순은 화가 난 울상으로 달래듯 말했다. "다시는 이런 짓 저지를 생각하지 말아요." 귀순은 다짐을 받고 풀어 주었다. 이 일이 있은 뒤로는 숫사람들은 그녀에게 강제로 실제 성행위를 하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이외의 모든 일에 있어서는 여전히 그들은 귀순의 여린 마음을 발판으로 해 그녀의 몸으로 마음껏 그들의 내키는 바 온갖 유희를 즐기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모든 일의 처리가 어려워진 귀순의 몸을 씻겨줄 때에는 필요 이상으로 특정 부위만을 철저히 씻겨주며, 생리작용의 수발을 들어줄 때에도 각종의 불필요한 행위를 일삼아 그녀를 울먹이게 했다고 하는데 이에 관한 더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귀순과 일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아온 지가 약 이십 년 가까이 되었다. 그 동안 일사람들 사이에서는 여러 단계의 상하관계의 조직이 성립되었다. 엘레나는 이들의 총 보스의 자리에 앉아 이들을 감독했다. 그녀는 사냥과 목축의 전 과정의 기획을 짜서 지시하는 역할을 했다. 다른 일사람들의 역할은 리즈 등 몇 명은 중간 보스로서 명령전달을 하고 나머지는 직접 가축을 기르거나 야생짐승을 잡아오거나 해서 중간 보스에게 상납하는 체제로 이뤄졌다. 갇혀있는 地勢의 탓인가 변칙적인 체제의 탓인가. 여전히 그네들에게는 가지고 있는 문헌자료를 토대로 새로이 문화를 일으켜 나라의 기틀을 세울 의지가 생기지를 않았다. 보다 효율적인 생산의 기술 등이 결여된 상황에서 생활유지를 위한 그들의 일과는 나날이 연년이 더해 가는 고됨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행동능력만을 믿고 마음껏 자기들만의 생활을 누리던 일사람들은 이러한 생활여건 속에서 하나 둘 나이를 먹어가자 일일이 모든 생업의 만사를 제손으로 하는 것이 힘들고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일사람들은 서로 자신이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남을 자신의 부하로 부려 고된 허드렛일을 대신 하도록 하기 위해 서로 겨루고 다투기를 계속했다. 이러한 체제가 변함없이 계속되자 많은 일사람들은, 특히 자신의 서열이 낮게 책정되어있는 자 일수록 자기는 앞으로의 일생 동안 고된 허드렛일을 떠맡는 말단 부하로서의 생활만을 계속해야 될 것을 생각하니 앞날이 암담했다. 이러한 판국이니 개개인의 일의 능률도 떨어지고 생산성도 줄어들어 생활수준이 오히려 애초에 엘레나가 집권하기 이전만도 못하게 되었다. 이러는 중에 중간보스인 리즈는 엘레나에게 말했다. "엘레나, 우리의 삶의 질이 갈수록 더 떨어져 가는 것 같애.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어?" "무엇이? 우리 중에 굶는 사람은 없잖아? 그래서 남는 걸로 조오기 저 여자와 숫사람들까지도 먹이고 있잖아? 뭐가 어때서?" "그야 너는 가운데 잘 되어있는 집에서 뭐든지 그중 좋은 것들만을 골라 쓰니깐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를 좀 봐. 집들도 낡았고 옷들도 헤져있고 다시 짓고 다시 만들어야 하는데도 하지 못하고, 사냥 갔다가 부상당해도 치료할 방법이 없고, 더울 때는 밖에 나가자면 모기들이 설쳐서 잠을 못 자고 안에 들어가면 너무 덥고, 추울 때는 집안에 들어가도 너무 춥고 땔감은 너무 부족하고 등등 도무지 삶을 위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를 않았어. 매일 근근히 먹고사는 데에만 만족하면 도대체 사는 의미가 무엇이냔 말이야?" "뭐긴 뭐? 일사람으로 나서 자아가 가진 능력을 유감없이 실현해 보는 것이 삶의 의미 아니겠어?" "너야 총지도자이니까 자기 하는 일의 의미를 느낄 수 있어 그렇겠지만 우린 아니란 말야." 이 말을 뱉고 리즈는 말을 잘못했음을 느꼈다. 그러나 이미 말은 하고야 만 것이다. 엘레나는 얼굴이 붉으락하며 노기를 띠었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살짝 돌리다가 도로 리즈를 쳐다보고는 "넌 그래도 내가 중간보스를 시켰는데 그럴 수 있어?" 하고는 다시 밖을 돌아보고 밖에 있던 여자 하나를 불렀다. "카체리나, 앞으로 네가 중간 보스를 담당해. 그리고 리즈 너는 오늘부터 말단 작업원의 위치에서 일한다." "어머 정말이에요? 엘레나 언니?" "그럼, 정말이지. 너 나이 어리다고 말 안 듣는 년 있으면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카체리나는 엘레나와 리즈보다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녀도 나이가 마흔 살이 가까워져 아랫사람으로서만의 역할에 적잖이 싫증을 내고 있는 이들 최연소층 일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엘레나, 그런 식으로 하지 마." "뭐가 어째? 너 또 그러면 징계위에 회부할 것이니까 앞으로 잠자코 네 일이나 해. 내게 말도 함부로 건네지 마." 리즈는 권력의 서열에서 밀려났다. 그녀는 하층 일사람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녀는 그네들과 서로 자기들의 불만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사귀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 그녀는 같은 입장의 일사람 서너 명과 함께 신세한탄을 주고받았다. "우리들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 이런 일만 해야 되나?" "힘들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이러다가 늙으면 어찌 살아야 할 지 모르겠어..." 리즈는 선뜻 깨달은 바가 있어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둥그스름한 얼굴에 쌍꺼풀진 적갈색 눈이 크게 반짝였다. "아니다. 우린 그전에 노라장군 등 여러 원로중신들의 통솔을 받아가며 일하지 않았어? 나이 먹은 그녀들은 젊고 어렸던 우리들을 아랫사람으로 부리고 자기들은 지휘 감독만 하고 살았었잖아?" 그녀는 목청을 조금 높여 이들에게 설명하듯 말했다. 그러자 다른 일사람 하나가 "그런데 우리 밑에는 우리보다 젊고 어린 일사람들이 없잖아?" 하고 말을 받았다. 리즈는 다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아랫 세대는 새로 만들면 되잖아?" "어떻게?" "어떻게긴 어떻게? 지금 저 구석배기 천막에 살고 있는 저 여자는 구경거리로만 저렇게 요상하게 호리병 마냥 생긴 줄로 아니?" "응? 아 그 몸집만 크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해서 숫사람들과 같이 우리 허드레 심부름만 하는 그 여자?" 일사람들 중에서 지능이 낮은 축에 속한 자들은 아예 여황족의 해야 할 역할이 본래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지내 왔었다. "참. 여태 그것도 모르다니, 그 여자를 이용하면 우리의 밑의 일을 해 줄 차세대 일사람들을 많이 낳을 수 있단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그 여자가 아이를 낳게 할 거야?" "체제의 변화를 다시 일으켜야지. 이젠 때가 됐어." 그녀는 자리를 옮겨가며 기회를 만들어 다시 다른 일사람들에게도 여황족의 본래 역할에 대해서 약간의 설명을 해 주었다. 그녀의 설명을 들은 여자들은 모두 그녀의 말에 큰 기대를 했다. 자신들에게 부담된 밑사람 역할을 다시 넘겨받을 차세대를 길러 낸다는 것은 실의에 빠졌던 그네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녀는 같이 앞장서기로 한 동료들과 함께 모의하면서 이들에게 말했다. "내일 엘레나와 회의하는 자리에서 내가 그녀의 말을 되받아 칠 터이니 그 때에 너희들이 모두 우리의 의사표시를 하면 돼. 내가 말을 하면 내 말을 따라 말을 맞추어 나가면 되는 거야." 모의가 끝난 후 이들은 함께 결의했다. "이래 부하가 되나 저래 부하가 되나 마찬가지다." "우리를 받쳐 줄 차세대를 낳기 위해 여황을 다시 모시자." 이렇게 하여 몇몇의 고위층을 제외한 많은 일사람들은 다시 귀순마야희고를 여황으로 모시기로 작정하고 권력자의 위치에 버티고 있는 엘레나를 타도하기로 결의했다. 거사의 날이 왔다. 엘레나가 주재하는 회의가 열렸다. 이번 달의 생산량과 소비량을 산출하고 목축에 의한 생산량의 부족분을 메우기 위한 다음달의 사냥의 작전을 토론하는 자리였다. "저 북쪽의 산기슭에 짐승이 많이 살고 있으니 잡아오는 것은 제1분대, 가죽을 벗기는 것은 제2분대, 고기를 저장하는 것은 제3분대가 각각 맡아 처리하고 제4분대는 소비관리를 맡도록 하시오." 엘레나는 지시했다. 평소에는 모두 지도자의 지시이니 그냥 받아 듣고만 있었는데 이 때 리즈가 나서서 말했다. "나를 어떻게 알고 창고지기나 하란 말이야? 나도 너같은 권한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냥의 작전도 짜고 식량수급의 원활한 조정도 할 수 있어." 갑작스런 이 말에 대처할 틈을 주지 않고 또 다른 여자는 말했다. "원 참 이 나이에 어떻게 날랜 짐승을 찾아다니며 사냥을 하란 말이야? 몇백 미터만 쫓아가도 나는 숨이 헐떡거리는데 짐승은 저 멀리 도망가고 마는데..." "원 이 나이에 짐이나 나르면서 살라니 참... 그냥 돌아다니기도 힘겨운데..." 뒤이어 너도나도 한 마디씩 하며 모두들 웅성거렸다. 엘레나는 뜻밖의 이들의 말을 듣고 당황하면서 "그럼 어쩌란 말인가? 나 혼자 이 모든 일을 다 하란 말인가?" 했다. 이러자 리즈는 다시 앞장서 나서서 이야기했다. "네 혼자 다 하든지... 어쨌든 우리는 네가 시키는 허드렛일만 하며 살 수는 없어. 우리도 이제는 아랫사람들에게 일시켜 가면서 좀 품위도 갖추고 편안히 살아야지 원. 일사람 인생 길어야 백년인데 살면 얼마나 산다고 이렇게 아둥바둥 살아야 한단 말이야?" "이런 방자한... 여봐 저년을 어서 잡아 가두어라!" 그러나 다른 일사람들도 엘레나의 지시에 따르기는커녕 다시 빈정대면서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뭐 그래. 호호호." "쟨 내 친군데 어떻게 차마 체포할 수 있겠어?" "쟤가 내 할말 다 해주네. 후후 재밌다." 하며 오히려 더 신이 난 듯 왁자지껄 했다. 사태를 파악한 엘레나는 다시 이를 악물고 냉정을 되찾고는 리즈를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어떡하란 말야. 리즈 네가 이 자리에 대신 앉을래?" "무슨 소리? 나는 너와 달라. 나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이러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럼 도대체 바라는 게 뭐야?" "그냥 네가 물러나면 돼. 나머지는 우리들이 알아서 처리할게." 자리에 모인 일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엘레나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지도자의 자리에서 물러나시오." 엘레나는 멈칫했으나 다시 자세를 가다듬으며 이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안 돼 우리 모두의 뜻도 아닌데 목청높이며 나서는 너희들 몇몇의 말만을 들을 수는 없다." 그러자 리즈는 다시 덧붙였다. "우리는 이미 모두들의 뜻을 알아보고 온 거야. 여기 없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 일거야." 엘레나도 속으로는 수긍했다. 그러잖아도 생활의 질이 처음에 여기 자리잡을 때보다도 떨어져 가고 있음은 그녀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전체의 의사가 아니라고 하며 물러나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리즈는 엘레나의 속마음을 알아챈 듯, "보복을 당할까 두려우니? 그럼 내가 이 자리에서 모두에게 약속할게." 하고는 모두를 돌아보며 "앞으로 엘레나가 물러난 이후에 그녀에게 보복을 목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것은 절대금지하고 어기는 자는 벌하기로 한다. 동의할 수 있겠니?" 했다. 리즈의 이 말을 들은 일사람 몇몇은 "에이 우리가 그 동안 저년한테 당한 것을 생각하면..." "그 동안 너무 억울했어..." 하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리즈는 "얘들아. 참아야 해. 그러지 않으면 얘가 자기 자리에서 안 물러난단 말야. 그러면 그 동안의 우리의 활동 내역이나 이곳 지리에 관한 정보 등 얘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이 많은데 그걸 우리가 인계받지 못하고 앞으로도 불편이 많을 거야. 그리고 여태 좀 못되게 굴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 곳에서 살아가는데 때로는 잘 이끌어 준 것도 없지 않아. 그러니 좀 참고 동의해 줘." 하고 모두에게 부탁했다. "할 수 없지 뭐. 우리야 뭐 아는 거 있니? 그냥 누가 이끌든 따라하면 되는 거지. 어쨌든 밥 잘먹고 옷 잘입고 좋은 집에서 살게만 해 줘. 부탁이야." "그래 고맙다. 그럼 약속한다." 리즈는 다시 엘레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 신변도 내가 보장하니 이제 자리를 물러나 줘." "마음대로 하려무나." 엘레나는 그저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엘레나가 간 뒤에 리즈는 모두에게 말했다. "자. 이제 모두들 각자의 생업에 전념하도록 하고 너희 몇 명만 나를 따라와봐" 리즈를 비롯한 주요 일사람들은 귀순에게로 갔다. 귀순은 이 때에도 자신의 침상에서 숫사람들의 장난기 어린 애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귀순의 배 위를 놀이판으로 해서 '가다서다' 라는 편지(片紙)놀음을 하고 판에서 이긴 자는 다음 판에는 자기가 원하는 부위를 만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그들이 정한 놀이였다. 귀순의 배 위에는 직사각형의 종이조각들이 더러는 멧돼지, 달, 벚꽃 등이 그려있는 앞면을 보이고 난잡하게 놓여져 있고 더러는 적갈색의 뒷면을 보이고 엎어진 채로 쌓여 있었다. 그러면서 네 명은 조각종이를 꺼내 놓을 때마다 그것을 귀순의 배 위에 힘껏 내리치고 귀순의 입, 양 젖가슴, 음부를 사정없이 만지작거렸다. 귀순은 이제는 모욕감도 만성이 되어서 이들의 이런 장난쯤은 그냥 일상사로 넘기고 있는 실정이었다. 놀음이 끝나자 이번에는 술판이 시작되었다. 귀순을 가운데 놓고 빙 둘러서서 그녀의 배 위에 안주를 놓고 술을 권작하며 즐기는 것이었다. 그 중 하나는 술잔을 귀순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다른 하나가 "야 그러지 마. 숨쉬면 귀중한 술이 엎질러지잖아?" 하고 다시 내려놓게 했다. 이윽고 그들이 모두 취기가 돌자 다시 그 중 하나가 귀순에게 술을 건네며 "우리 폐하께서도 한잔 드셔야 하지 않겠어요? 너무 보리자루 마냥 가만히 있지 말고요." 하고 술단지째 거의 들이붓듯이 귀순의 입가에 가져갔다. "안. 안 마셔." "에이, 드세요. 저희들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산다고 이렇게 까다롭게 구세요? 이것도 겨우겨우 구해온 거예요." 귀순이 안 마신다고 고개를 돌리고 있자 건너편에서 보고 있던 좀 거친 성격의 숫사람은 "아니 댁에가 사는 게 누구 덕에 사는데 우리 기분도 안 맞추어 주는 거요?" 하고 퉁명스럽게 소리질렀다. 이 말에 그 옆의 좀 점잖은 티 내는 다른 자는 다시 "에이 그래도 그렇게 험하게 말하면 쓰나. 명색이 우리의 여황님인데 우리가 잘 타일러 기분을 맞춰드려야지." 하며 귀순의 뺨을 쓰다듬고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이들이 귀순을 놓고 계속 승강이를 벌이자 귀순은 곧 그들의 원하는 대로 해 주려고 마음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몸이나 일으키고서 마셔야 하잖아. 잠깐." 그런데 귀순이 어깨를 나무기둥에 기대려고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먼저 술을 권하던 자는 귀순의 입술에 술병을 댄 채로 있다가 부주의 해 단지째로 엎질러버렸다. 술은 귀순의 목에서부터 몸의 중앙선을 축으로 하여 삽시간에 흘러내렸다. "아앗. 이 귀중한 술을... 이걸 어쩌나." 술병을 들었던 자가 귀순의 배 위에 흐르는 술을 손으로 막아가며 말했다. 그러자 건너편의 자는 곧 엎드려 귀순의 몸에 입을 맞추며 "할 수 없지... 없어지기 전에 핥아서라도 다 마셔야 하지 않겠어?" 하고 술에 젖은 그녀의 몸을 핥았다. 다른 자들도 곧 그의 행동을 뒤따랐다. 그들은 귀순의 몸 위의 술을 다투어 핥아 갔다. 그리고는 下部의, 아직 많은 양이 흘러들어가 괴어있을 듯한 곳에 이르자 그들의 다툼은 더욱 심해져, 괴어있는 술을 자기가 손수 덮개를 열고 다 퍼 마시겠다고 서로 치고 박기도 했다. 이들의 다툼이 심하면 심해질수록 귀순의 수치감과 서러움은 더해갔다. 더이상의 자세하고 구체적인 기록 역시 남아 전해지지를 않는다. 귀순과 숫사람들이 따로 몰려서 사는 구석편 천막에 일사람들의 일행이 당도했다. 리즈는 이들을 향해 크게 소리질렀다 "이놈들 썩 물러가지 못할까!" 숫사람들은 갑자기 닥친 일사람들의 출현에 혼비백산 흩어져 도망쳤다. 그들의 움직임은 오로지 성행위의 동작방향으로만 강하고 다른 생산적인 일에는 부적합하며, 전혀 여타의 일상사에 대한 合心性이나 의지력도 없으므로 숫사람은 애초부터 모든 일과에서 일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저런. 가엾기도 해라 원..." 모두들 이제껏 무심하게 구석의 천막에 내버려져 있던 귀순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귀순이 애써 자기 옷을 지으면 짖궂은 숫사람등이 이내 찢어버리기 때문에 옷도 하나 제대로 입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칼에 몸 군데군데에는 세게 집히어 상처난 자국이 숱하게 있었다. 일사람들은 가끔 가다 귀순의 천막으로 가서 맡은 일의 성과를 보고 먹을 것을 던져 주며 새 할당량을 일러 주고는 돌아올 뿐 그녀의 일상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두질 않았던 것이다. 리즈를 비롯한 일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이제 당신을 여황의 자리로 다시 모시겠으니 우리를 위해서 차세대 아이들을 낳아 주세요." 하며 그들은 귀순을 다시 여황의 지위로 받들을 약속을 했다. 일사람들은 우선 그간 엉망이었던 귀순의 생활환경부터 손봐야 했다. "세상에, 이렇게 어지러울 수가... 우선 목욕부터 시키고 정리정돈이나 해야겠네." "아니 저어기 엘레나가 살았던 곳으로 모시지. 그곳이 그래도 젤 낫잖아?" "그래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귀순의 몸을 깨끗이 씻고 단장해 주고 그녀의 거처를 다시 마련해 잘 정리정돈해 주었다. 귀순은 예기치 못하게 갑작스레 들이닥친 변화에 얼떨떨하며 가만히 그들이 해 주는 대로 따랐다. 그러면서도 자기 앞에서 수고해주는 이들에게는 "고마와요. 내가 부족한 탓에 여러분께 이런 수고를 끼쳐 드려 미안하기도 하구요." 하며 젖은 눈을 글썽이며 말을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뭘요, 다 필요한 일인데요." 일부 일사람은 솔직하게 그녀의 말에 답했다. 일사람들은 귀순에게 강제적인 노동을 시키는 것을 중단하고 그들의 능력을 다해 귀순이 편안히 지낼 수 있게 생활물자를 보조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몸을 돌보는 각종 봉사도 해주었으며 숫사람들의 무절제한 접근도 통제했다. 일사람들은 귀순을 다시 옹립한 소기의 목적을 곧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제 어서 새나라를 건설할 신세대 창조를 위해 수정식을 거행하자." 리즈를 비롯한 주요 일사람들과 귀순은 첫 수정식의 준비를 했다. 귀순도 과년한 때가 되었으므로 더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야! 신난다." 귀순을 가지고 장난을 못하게 되자 의기소침했던 숫사람들은 다시 환호하고 기뻐했다. 비로소 그들은 여황국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갖추어진, 제대로 된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문헌을 참고해 신생아 양육실의 설비를 갖출 준비를 하는 등 모두가 수정식의 준비에 바빴다. 그러던 날이었다. 귀순은 주변의 일사람들에게 말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요. 우리가 사는 땅 밑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애요." "폐하, 무슨 얘기예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아녜요. 지금 소리가 점점 더 다가와요. 어서 피해요." 귀순이 하도 재촉하니 영문을 모르는 일사람들도 귀순을 데리고 소리가 난다고 하는 곳으로부터 멀리 피했다. 그러자 먼저 소리가 난다는 방향으로부터 "쾅, 쾅, 쩌억." 지축을 흔드는 떨림이 감지되더니 물가의 땅이 쩍쩍 갈라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지진이었다. 지진은 그치지 않고 호수 여기저기서 계속 일어났다. 호숫가의 땅이 갈라져 전에 없던 새 灣이 생겨나는 등 그 정도는 매우 심했다. 물가에 터전을 자리잡은 그들에게는 물가 어느 곳도 안전하지가 않았다. 며칠동안 대피를 계속 하던 귀순과 주요 일사람들은 대책을 숙의했다. "이제 이 곳을 떠나야 할 것 같아요." 귀순은 조심스레 말했다. 알다시피 그녀는 처음부터 이 곳은 자기가 정착할 만한 곳이 아니라고 느끼고 있었다. "이제 곧 우리의 나라를 제대로 세우려고 하는데 또다시 유랑을 떠나야 한단 말인가요?" 한 일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으나 사실상 그냥 푸념하는 소리지 귀순의 의견에 대한 반대의 의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곧이어 다른 일사람들도 귀순의 의견에 따라 "예 이곳은 안전하지가 못해요."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하며 찬성했다. 귀순은 다시 부언했다. "그리고... 많은 백성을 낳아 기를 만치 지세의 포용력이 부족해요."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에 다시 한 일사람이 귀순에게 물었다. "그런데 땅은 이곳을 지나도 더 있을까요? 우린 거의 땅 끝까지 온 것 같은데요. 이곳은 우리가 오랜 동안의 유랑생활을 거쳐 겨우 발견한, 그래도 비교적 살기 좋은 땅이라고 했던 곳이 아닌가요?" "땅은 이 다음에도 더 있어요. 더..." 다시 말하던 귀순은 갑자기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와락 치받치는 울음을 터뜨렸다. 이 곳에 자리잡은 뒤로 겪었던 많은 일들이 그녀에게 연이어 떠올랐다. 그러나 귀순은 후회하지 않았다. 이 곳에 머무름으로 해서 충신들의 죽음을 그나마 객사를 면하고 편안토록 해 주었다고 그녀는 스스로 위로했다. 귀순의 울음에 일사람들은 더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들 모두도 이제 떠나야 함은 피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막 새로이 생활의 정착이 이루어지려는 때에 그들은 다시 이 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겨우 마련해 놓은 생활의 기반인데 모두 무위로 돌리고 새로운 시작을 다시 해야 한다니..." 모두들 허탈해 했다. 그 동안의 생활용구 중에 버리고 갈 것은 버리고 가지고 갈 것은 다시 챙겨서 떠날 준비를 했다. 그간 쓰지 않았던 이동생활차도 다시 점검해 이용가능하도록 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유목민 식의 생활을 해 왔기에 새 이동에 크게 어려운 일은 없었다. 광혜 20년, 바칼여황국 귀순마야희고와 그녀의 백성들은 그들의 기왕에 개척한 터전을 버리고 새 땅을 찾아 다시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나야 했다. 이 해는 곧 북미희여황국 제13대 여황 헤다 발키리아의 즉위 510년이고 서북평원의 라사여황국 초대 여황 소냐 프레이아키에프 즉위 30년이며 북미희여황국으로부터 동방식민원정대가 출발한 지는 35년이 되는 해였다. "윙. 윙. 웅. 웅." 녹슬고 낡은 탐험차가 움직였다. 그나마 여황국시대 특유의 섬세하고 꼼꼼한 기술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면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호수의 남쪽을 돌아 나가니 또다시 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아직도 대륙은 계속되었다. 일행은 남동쪽을 향해 계속 달렸다. 낮의 태양은 계속 더 뜨거워졌다. 여황용 안락수레 안의 귀순은 땀을 비오듯 흘렸다. 차의 내부는 그녀가 흘린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그만큼 그녀는 많은 물을 마셔야 했다. 그러나 충분한 물이 없었다. 이미 5미터 가까이 자란 그녀가 필요한 물의 양은 막대했다. "물, 물 좀" 귀순은 고통스러워 신음했다. 본래 자신으로부터의 열이 항상 솟아나 그걸 방출하기에도 바쁜 귀순의 몸이 이 熱砂의 지대를 거치는 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폐하 조금만 더 참으세요. 곧 물줄기를 찾을 겁니다." 새로 귀순을 돌보는 일을 맡은 일사람 아우링바트가 말했다. 주위의 일사람들도 그녀를 진정시키면서 어서 갈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더러는 뒤로 수군대면서 "우리들은 며칠간 물을 제대로 못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요전에도 저 여자에게만 물을 주었는데 또 물을 달라다니..." 하고 그녀를 향해 눈을 흘기는 이도 있었다. 또한 범인족 몇십 명 분의 물을 소비해야 하는 그녀를 그저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일사람들은 당장의 응급조치로서 차창들을 열고 엷고 성긴 귀순의 옷마저 벗겨 몸에 최대한 바람을 맞게 했다. 동승한 자들 일부는 계속해서 "에이 찬바람을 계속 쐬기는 불쾌한데..." 하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미 차세대 생산을 위해 서로 합의 한 것은 기정 사실이므로 그들의 지도층은 귀순을 계속 보호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밤이 되니 기온은 급강하했다. 귀순에게는 이제 더위의 고통은 없었다. "폐하 이제는 좀 괜찮으세요?" 아우링바트가 묻자 귀순은 "응 괜찮아요. 그런데 좀 춥네." 하고 대답했다. "폐하가 춥다니... 괜찮은 거죠 뭐." 아우링바트는 종일토록 더위와 갈증에 시달린 귀순이 춥다고 하니 이제 시원하게 된 걸로 알고 그냥 넘겼다. 낮 동안에 귀순을 돌보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던 주위의 일사람들도 피로에 지쳐 차가 세워지자 모두들 자리를 찾아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다가 한밤중 귀순의 신음소리가 나서 다시 눈을 떴다. "아아니, 이런." "이를 어쩌나..."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랐다. 귀순은 얼음 조각들에 갇혀 있는 것이다. 낮 동안 흘린 땀에 흥건히 적셔있는 몸이 영하의 기온을 맞으니 쩍쩍 얼어붙어 군데군데 살이 트이고 진물이 나곤 했다. 일사람들은 부담은 더 늘어났다. 다시 귀순의 몸에 약을 바르고 동상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했다. 다음 날 해가 질 무렵에 아우링바트는 "해가 져요. 어제 같은 일은 미연에 방지해야 해요. 폐하의 온몸을 철저히 닦아 물기를 제거하는 조치를 취해야 되겠어요." 하고 다른 일사람 부르마, 오유나와 함께 귀순의 몸의 물기를 구석구석 철저히 닦았다. 귀순은 "미안해요. 너무 걱정과 부담을 주게 되어서..." 하며 얼굴을 또 붉혔다. "그렇게 생각하실 것 없어요. 원래 우리는 여황폐하를 돌보아 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요." 아우링바트는 귀순을 위로했다. 그녀는 이전에 귀순이 구석의 천막에서 숫사람들과 살면서 고생하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며 그 와중에도 측은한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귀순이 여황으로 복위되고 시중들 사람을 찾자 그녀는 곧바로 자원했던 것이다. 이러면서도 계속되는 갈증은 귀순을 고통스럽게 했다. "강이 보인다." 앞에서 가던 이들이 기쁨에 소리질렀다. 그들은 겨우 물줄기를 찾아 따라 나아갔다. 강을 따라 물은 구할 수 있었다. "이 곳에서 일단 한번 쉬면서 생활해 봅시다." "그래요. 살아 보고서 괜찮으면 정착할 수도 있고..." 일사람들은 이렇게 상의하면서 일단 자리를 잡아 보기로 했다. 귀순도 묵묵히 그들의 의견에 따랐다. 이들은 이전의 유목생활의 방법으로나마 잠시 자리잡아 생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안가서 이 곳으로부터 떠나라는 자연의 명령을 받았다. "어마. 강이 말라버렸네." "이젠 흙탕물조차도 구할 수가 없네." 몇 달 지나 강은 다시 마르고 말았다. 물이 있는데도 숲이 우거지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시 일행은 길을 떠났다. 그들은 더욱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가도가도 황량한 바윗돌 투성이의 사막만이 보일 뿐이었다. "걱정이야. 차들도 이제는 오래 된 것들이라 혹 모조리 기능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되는 데..." "여태 무계획한 생활만을 계속하면서 아무런 기술축적을 해 놓지 않았으니..." 추가의 불안이 그들에게 더해졌다. 그들로서는 차가 고장나면 어찌할 방도가 없다. 벌써 당초의 열다섯 대의 탐험용 다방향쌍무한궤도차들 중에 이제까지 여섯 대가 망가져 쓸 수가 없게 되어 도중에 버려졌었다. 아니 망가졌다기보다는 그냥 사소한 작은 고장일 수도 있는데 그들이 전혀 대응책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다못해 연료공급을 위한 태양축전지도 조금 사용자의 범위를 넘는 이상이 생기면 속수무책이었다. "이들을 모두 사용 못하게 되면 다른 대책이 없어. 어떡하나." "말을 타고 다니지, 옛날 선사시대에는 그랬다고 하는데..." "체, 언제 말을 길들여?" "우리는 그렇다 해도 여황폐하는 어떻게 모셔?" "마차를 만들지." "피익, 어느 철년(季年)에 그걸 다 만들어? 우린 만들 줄도 모르는데." "아냐 마차는 자동차보다는 훨씬 쉬울 거야. 전설에 의하면 마차는 혼자서는 나아가는 장치가 없어 못 가고 말을 연결시켜서 말이 끌고 가게 했대. 그러면 훨씬 구조는 단순할 거야." "그래, 만일 그렇게 되면 그래서라도 가야지. 그 때봐서 한번 생각해 보자." "그것도 안 되면 어떡하지?" "정 안되면 까짓거 그냥 사막에서도 살려면 못살 것 같아? 우리 만물의 영장이 말야." "우리 모두, 특히 여황폐하에게 필요한 그 많은 물을 어디서 퍼와?" "땅을 파야지 뭐." "아무데나 파도 물이 나올까?" "그럴 거야, 깊이만 파면." "아무 학문의 분야이든지 깊이 파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치와 같은 것인가?" 일사람들은 이 즈음에 와서는 점차로 학문에 대한 관심을 가져가고 있었다. 물론 아직도 제대로 여건이 되지 않아서 실제 학습을 하고있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 중요성은 서로들 깨달아 가고 있었다. "듣고 보니 그럴 듯도 하네, 호호."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四覽이 가능해야 진정한 사람이지. 우리 이제부터라도 진정한 사람이 되도록 좀 노력해 보자구." "그래 우리는 우리 주변사방의 모든 것들을 제대로 보는 눈을 가질 필요가 있는 거야." 이렇게 일사람들은 걱정 반 수다 반으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계속 나아갔다. 몇 개월을 걸려 어렵게 사막에서의 생활을 보내고 나니 다시 초원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 그래도 좀 낫다. 가축을 먹일 풀도 있으니 최소한 식량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그래도 썩 좋지는 않은데... 이런 곳은 우리가 저번에 호숫가에 살기 이전에도 많이 지나쳐 왔던 곳인 것 같은데..." "그래도 당장 아쉬운 대로는 좀 괜찮잖아?" 일사람들은 자기네들끼리 얘기를 주고받다가 귀순에게 물었다. "우리 귀순 여황폐하는 어떠세요?" 귀순은 이들의 물음에 "괜찮아요, 살기에는 그런 대로... 하지만..." 하고 얼버무렸다. 일사람들은 귀순의 대답도 시원치 않다는 것을 알고, "흡족치 못하다는 얘기시죠? 그럼 살아가면서 계속 동쪽으로 나아가야죠." 하며 곧 그들의 의견도 귀순의 말에 따라 수렴시켰다. 이번에는 일사람들은 왠지 전적으로 귀순의 뜻을 헤아리려는 것 같았다. 다시 그들은 호수에 자리잡아 살기 이전의 불안정한 유목생활을 상당 기간 해야 했다. 여름은 뜨겁고 겨울은 춥고... 귀순의 얼굴과 몸매는 추운 바깥날씨에 따라 좀 더 부드러운 곡선을 가지게 되었으며 피부는 직접 간접으로 햇빛을 자주 받아 옅은 황색을 띤 상아색과 같이 되었다. 머리칼은 갈색으로 변했고 눈동자는 적황색으로 진해졌다. 나머지 범인족 일행들도 몇십 년간의 歷程에 의해 피부가 많이 그을려지긴 했지만 귀순처럼 온몸이 조화를 이루며 적응되어 나가는 형태는 아니었다. 그저 칙칙해진 머리칼 색과 검회색이 가미되어 붉게 그을린 피부를 가질 뿐이었다. 그들 모두의 겪어온 고생은 그들 제 각기의 모습에 배여 있었다. 정말이지 이 지리한 방랑은 이제는 끝나야 할 것이다. 겨우 되찾은 이네들의 충성심인데 또다시 고통스런 여정이 계속된다면 일사람들에게 크나큰 부담을 주는 그녀의 처지는 또 어찌될 지 모른다. 아니 그들 일사람들도 이제는 자기들을 받쳐 줄 차세대가 필요함을 느끼는 나이인 것이 파국을 막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살아나가기 위한 일에 지친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그들의 이상향이 실현되기를 바랬다. 그것은 그렇게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향락이 있는 곳도 아니었다. 단지 살아가기 위한 온갖 걱정근심이 없는 곳만이라도 가졌으면 하는 것이 그들의 소박한 바램이었다. 그들의 진행하는 저 앞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더욱 다가가 자세히 보니 꽤나 높고 위용스런 산들이 연이어 늘어서 있는 산맥이 보였다. 그 중 가장 높은 산의 산등성이에는 구름의 띠가 신비로이 자욱히 퍼져 있었다. 저 산의 너머에는 정말 무언가 이상향이 있을 것처럼. (14) 理想國의 봄 그들은 무언의 합의를 했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어 저 앞에 보이는 높은 산을 향해 무작정 달려갔다. 갈 데 까지 다 가서 더이상 차로는 오르지 못하게 되자 대열은 일시정지했다. 몇몇 일사람은 밖으로 나와 주변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갈 길을 논의했다. "이 곳 산기슭에 한 번 자리잡아 보는 게 어떨까? 온갖 동식물이 풍요로이 번성하니 살기에 좋을 것 같은데..." "그래도 차가운 서북풍을 막으려면 저 산을 돌아 건너편에 자리잡아야 하지 않겠어?" 이들이 저 앞에 보이는 산을 돌아가 보기로 하고 다시 승차하려 돌아설 무렵, 귀순마야희고는 그녀의 성긴 베옷을 걸치고 그녀의 차에서 나왔다. 그녀가 갑자기 나오자 밖에 나와 있던 일사람 중의 한 명이 말했다. "폐하 웬일로 나오십니까? 아직 사람이 살 만한 곳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저기 저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어. 내가 그렇게 바라던 것이 저기 있을 것 같아..." "그건 어렵습니다. 사람을 몇 명 파견해서 조사해 보고 오게 하도록 하지요." "싫어. 난 갈래. 저기. 꼭." 비록 다시 자기의 지위를 되찾았다고는 하나 일사람들에게서 한 차례의 크나큰 수모를 당한 이후의 귀순의 말투는 통치자의 권위라기보다는 보호받는 약자로서의 의기소침함과 연약함만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산의 頂上을 응시하는 이슬진 귀순의 눈동자는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응석을 부리듯, 힘들 것이니 자기들이 대신 가보고 오겠다는 일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자기가 직접 저 끝까지 올라가겠다고 했다.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해 이십여 명이 동행해 올라가 보기로 했다. 사실 차량으로도 꽤 깊숙이 들어와 있었으므로 산의 정상까지는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다. 산을 기어오르는 것은 평지를 서서 걷는 것보다 여황족의 몸체로서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연약한 피부가 바위 바닥에 긁히고 가시덤불에 찔리고 해서 자꾸 상처가 나곤 했지만 동행하는 자들이 즉각즉각 열심히 응급조치를 해 주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이 산의 정상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녀의 헐떡이는 숨에 앞에 쌓인 山 낙엽들이 이리저리 날렸다. 땀에 젖은 그녀의 몸은 온통 달라붙은 나뭇잎들과 잔가지들로 덮였다. 그녀도 더이상 마음의 힘만으로는 해 나가지 못할 지경에 다다를 즈음 드디어 산 정상이 눈앞에 보였다. 지친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정상에 손을 뻗치니 뜻밖에도 때마침 몰아치는 거센 바람에 물보라가 튀어 고된 산 오름에 열불이 나있던 그녀의 고운 손을 차갑게 적셨다. 깜짝 놀란 귀순은 다시 마지막으로 온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아..." 온 천지에 일시에 大和音이 울려 퍼지는 幻聽이 저절로 들리는 충격이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따라 흘러 다니는 구름에 가려 그 모습을 일거에 다 볼 수는 없었지만, 사방에 병풍처럼 드리워진 山勢의 가운데 웅장하니 자리잡은 파란 호수의 거울같이 맑은 물결이 긴긴 여행의 온갖 오욕에 지친 귀순마야희고의 마음을 달래 주듯 일렁이고 있었다. 저 멀리 동남쪽을 바라보니 그곳은 검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 진정 대륙의 끝으로 온 것이다. 남으로 連延히 펼쳐진 산들의 아름다움은 이제까지 지내왔던 곳들의 것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드디어 그녀의 마음에 안식을 찾을 곳은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경건하게 꿇어앉아 가만히 이 호수의 물을 손으로 퍼올려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의 앞가슴에 껴안듯이 뿌렸다. 동행했던 자들도 이 신천지의 壯觀에 한 동안 넋을 잃고 바라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귀순마야희고는 하늘인지 물인지 구분이 안가는 이 맑은 호숫물에 목욕했다.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은 평화스런 모습의 그녀를 이 하늘아래 첫 연못이 포근히 감싸안아 어루만져 주었다. 곱게 사랑 받아야만 할 그녀는 여지껏 얼마나 많은 가당치 않은 모진 풍파에 시달려만 왔던가. 애당초 그녀의 태어남의 목적은 그러한 것은 아니지 않았던가. 그녀의 북받쳐 터져 오르는 눈물은 바람에 날려 흩뿌리는 물보라에 뒤섞이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제 다른 무슨 이야기가 더 필요 있으랴. 이 곳이야말로 귀순마야희고와 그녀와 고생을 같이 한 모든 이들의 이상향을 세울 곳이 아니던가. 그들은 산을 내려와 양지바른 강가에 생활의 터전을 자리잡고 오랫동안 유명무실했던 그들의 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먼저의 호숫가에서 세운 나라의 명맥을 이어 이제 비로소 명실상부하게 그들의 나라를 다시 가지게 되었다. 나라 이름은 맑은 새 아침을 연다는 뜻으로 朝鮮 阿斯女皇國이라 했다. 때는 광혜 25년, 북미희여황국 헤다 발키리아 13세 즉위 515년이고 라사여황국 소냐 프레이아키에프 1세 즉위 35년이 되는 해이며 귀순마야희고가 눈물의 여로를 밟아온 지 근 40년이 되는 해였다. 사실상 광혜 年號도 이 때쯤에 정식으로 정해진 것이었다. 모두는 함께 새 나라 건설의 희망찬 출발을 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려 해마다 생활의 양식을 생산하도록 했다. 바람따라 구름따라 흘러 다니던 삶을 이제는 청산하고 흙의 고마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새 시대를 일구어내자는 것이었다. 그녀가 거처할 황궁은 당장에는 건축술을 터득할 수가 없어 제 격식을 갖추게 짓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이제까지의 움막과는 다르게 초가지붕이 얹히고 아담한 사립 울타리가 둘러졌다. 안마당을 醮禮廳 삼아 조촐한 대관의 식을 올렸다. 개나리꽃 싸리 다발이 그녀의 왕관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아래 귀순과 범인족 일동은 서로간에 큰절을 올림으로써 군민간의 사랑과 충성의 맹세를 다시 했다. 귀순은 이전의 얼떨하고 불안한 마음이 아닌, 수줍으면서도 행복감을 가지고 식에 임했다. 삶의 터전이 갖추어지는 대로 그간 너무나 늦추어졌던 새 세대 출산을 위한 수정식은 즉각 거행되었다. 부족하나마 그녀를 위해 마련된 보금자리 안의 온돌침대에서 귀순마야희고는 일사람들의 모처럼의 진지하고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으며 수정식을 위한 몸단장을 했다. 비록 미리 정해진 숫사람들과의 수정이라 하더라도 여인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최대로 발산해야 보다 건강한 아이들을 낳는 것이다. 숫사람들은 제대로 된 나라라면 벌써 자기의 역할을 마치고 하나 둘 생을 마쳐야 했을 나이들이었지만 오랜 방랑생활동안 그들의 역할을 할 기회가 없었기에 여지껏 살아남아 수정식의 때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귀순마야희고는 오랜 방랑생활을 마치고 비로소 다소곳이 자리잡은 여인의 모습으로 돌아와 자신의 화장 거울 앞에 앉았다. 그녀의 모습을 이제 刮目하여 다시 한번 보도록 하자. 女皇 貴順摩耶姬姑 1세. 오직 生産力과 女性美만을 좇아 일천년씩 일백대를 이어온 그 모습.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女人의 진한 향기는 퍼지고 주위의 기운은 그녀의 숨결로 가득 차고 만다. 전생인간 남자 하나가 그녀와 가까이 있어 본다면 그녀와의 마주함과 함께 여린 그녀의 마음 따라 쉬이 잔이슬 맺히는 그녀의 적황색 눈동자에 홀려 얼어붙다가 이윽고 그는 그 자욱한 女香에 휩싸여 色의 마약에 취한 듯 혼절하고 말 것이다. 엉덩이에 다다를 만치 길게 자란 그녀의 光彩나는 머리칼은 몸을 뒤척일 때마다, 펼쳐진 갈색의 비로드 위에 은모래가 쏟아져 출렁이는 듯 하다. 진종일 물기 촉촉한 뽀얀 살결을 통해 열과 물기의 放出을 要하는 그녀의 몸. 바깥공기 막는 버거운 옷은 입을 수 없어 부끄럼 감추려 그나마 손수 짠 옷 걸치더라도 성긴 실가닥 사이사이 그녀의 어여쁜 알몸은 드러나 보이니 혼자 아닌 뉘라도 함께 할 시엔 수줍은 얼굴 붉어짐이 당연지사다. 유난히도 實한 그녀의 허벅지는 왕성한 생산력을 위해 極히 발달한 골반부와의 자연스런 어울림이다. 그로부터 내리 뻗은 다리는 오로지 각선의 美를 추구하고 있나니 여황족의 진화는 한결같이 철저한 여성미의 지향인 연유라 허리는 너무도 잘록하니 움푹 들어가 그녀의 다리보다 가늘 듯 하다. 황세녀에게로의 젖물림을 위한 그녀의 젖가슴 유독 아름다움을 위해 너무나 잘 발달해 있어 그 무게는 그녀의 두 팔에 힘겨울 정도이다. 그녀의 生命庫, 더이상 어찌 말을 하랴. 바로 누우면 보드라운 대지 한 가운데 움푹 패인 신비의 옹달샘 수풀이요. 엎드리면 兩半球의 포근함에 싸인 생명의 地下寶庫라. 이 비옥한 寶地에 刺枝가 파고들어 씨뿌려지면 그녀로 말미암은 나라 이룩되어 찬연히 번성하리라.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 진 뒤, 이윽고 걷기 위함보다는 아름다움을 지향해 풍성한 골반부로부터 매끈하게 이어져 뻗어 내린 그녀의 다리는 들어올려져 양옆으로 걸쳐졌다. 이러한 수정식의 실행 방식은 일사람들 모두 고향을 출발할 당시에는 이 의식을 겪어 보지 못한 어린이들이었으므로 그 동안 보관해 왔던 문헌을 참조해 가장 교과서적인 방법으로 거행되었다. 그리고 기타 주변정리를 하고 나서 일사람들은 그녀의 침실에서 퇴장했다. 그러나 몇몇 노파심 많은 자들은 밖에서 문의 창호지에 침으로 구멍을 내고 그녀의 수정식을 엿보았다. 물론 성의 호기심에 의한 것은 아니었고 순전히 그냥 좀 지켜보기 위한 것이다. 혹 무슨 차질이라도 생기면 조치를 해야 하기도 하므로... 그녀의 방안은 원래도 항상 자욱한 여향을 뿜어내는 그녀가 가뜩이나 수정식을 맞이해 더일층 배가되어 뿜어내는 여향으로 가득했다. 아직 수정식의 경험이 없는 여섯 명의 숫사람들은 특별히 다른 방법은 취하지 않고 역시 교과서적인 기본과정을 따라 행했다. 그들은 배정된 순서에 따라 각기 차례로 귀순의 얼굴, 가슴, 배, 엉덩이의 순으로 애무하고는 그녀의 음부에 放射의 식으로 射精했다. 숫사람들은 비록 옛 남자에 비한다면 그들의 존재근거를 갖게 하는 부위가 매우 크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廣幅한 吸入口에 비하면 현저히 모자랐기 때문에, 피차간의 조여지는 맞물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냥 절구통을 드나드는 절구공이요 우물 속을 드나드는 두레박일 뿐이었다. 그녀는 처음 맞이하는 수정식에 따른 부끄러움 중에도, 맡은 바 역할을 비로소 하게 된 기쁨에 모처럼의 행복까지 느꼈다. 그녀는 여러 숫사람의 씨를 동시에 받아 임신했다. 더욱 극진한 일사람들의 간호가 행해졌다. 그녀의 잘룩한 배의 신축성은 놀라워 임신 중에는 평상시 자기 몸의 약 3배 가량이나 불어났다. 이러한 때에 그녀가 몸을 옴짝달싹 못함은 물론이었다. 그녀는 모든 일체의 행동을 중지하고 오직 임신 중의 몸조리만으로 지냈다. 약 한 달 동안의 임신기간 끝에 귀순마야희고는 드디어 성년 여황족으로서의 첫 출산을 해 닷새동안 밤낮을 쉬지 않고 일백이십 명의 아이를 낳았다. 이제 비로소 여황으로서의 제 구실을 얻게 된 귀순마야희고의 감회는 남달랐다. 오랜 유랑으로, 당연히 있어야 할 자기들의 후세를 가지지 못했던 범인족들도 매우 기뻐했다. 태어난 아이들은 곧 그들이 다른 어느 施設보다도 急히 서둘러 마련한 集團保育施設로 옮겼다. 그 規模는 勿論 女皇時代 開幕 直前의 全人類次世代共同保育施設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 以前의 自然生殖時代의 大型 産婦人科 病院의 水準은 되었다. 그리고 옛 傳統대로 서둘러 合成調劑한 最適化成長誘導粉乳를 使用해 키워졌다. 새로 낳은 아이들은 얼굴形, 皮膚色, 머리칼色, 눈빛 등이 모두 그녀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이제 비로소 그녀에 의한 새로운 民族이 생겨난 것이다. 貴順은 自身의 子女들을 가짐에 따라 名實相符한 女皇의 權威도 얻을 수 있었다. 새 나라에서의 生活은 亦是 豫想대로 前과 比較할 수 없을 만큼 모두가 滿足스러웠다. 周邊의 아름다운 景觀과 豊富한 資源도 그렇거니와 여기에다 모든 日常事가 얽힐 때마다 나타나는 貴順摩耶姬姑의 고운 마음으로부터의 德性으로, 모든 이의 情緖가 涵養되는 效果가 더해져서, 百姓들로 하여금 物心兩面으로 豊饒로운 生活을 누리게 했다. 貴順摩耶姬姑의 새 女皇國의 山河에도 봄이 왔다. 겨우내 寢殿에서 누워만 있던 그녀는 모처럼 밝은 햇빛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아직은 조촐한 規模로 지어진, 皇宮이라고 하기에는 어줍잖기만 한 居處의 뒷동산에 올라 貴順摩耶姬姑는 따스한 햇볕에 온몸을 내맡기며 풀 위에 엎드려 누워 향긋한 풀내음을 맡았다. 태어나서부터 무언가 모르게 마음속에 그리던 그러한 平安을 그녀는 가진다. 太陽조차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얼굴色과 같이 滿發한 진달래가 東山을 뒤덮고 있었다. 한 동안이 지났을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속에 살포시 감겨지려 하는 그녀의 눈을 다시 살짝 뜨이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貴順 女皇陛下, 食事하실 時間이에요." "응? 여기 와 봐. 이렇게 모두가 좋지 않니? 여기 와서 같이 하자꾸나." 先天, 後天을 통틀어 類例없는 理想國의 새 봄은 이리도 閑暇롭기 그지없었다. - 제 3 부 - (15) 백성 위한 삶 貴順摩耶姬姑가 새 삶의 보금자리에 자리잡아 살아감에 따라 그녀의 모습을 닮은 百姓들을 繼續 늘리우니 그리하면 그리할수록 포근한 이 新天地는 그녀와 하나가 되어 갔다. 이 땅은 애초에 그녀를 위해 豫備되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한 해에 한번 가량 餘名에서 二百餘名 사이의 아이들을 낳으니 歲月이 흘러 廣惠 一百年 頃에는 어느 덧 約 一萬餘名의 百姓들을 거느린 어엿한 한 나라가 되었다. 그녀가 처음 오른 山의 기슭으로부터 南으로 내려가 半島의 끝에 가까워 다시 우뚝 솟은 山의 기슭까지가 그녀의 領土였다. 그녀의 대쥬신 아사女皇國의 國家紀元의 年代는 애초의 그 湖水ㅅ가의 建國 때부터 合算했다. 지나온 쓰라린 記憶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國家 創建을 爲한 陣痛으로서 昇華시키기 爲함이었고 또한 後ㅅ날 언젠가 國力이 强해지면 그 옛날 苦難의 歷史가 새긴 곳을 다물하고자 함이었다. 貴順摩耶姬姑와 그녀의 臣下 百姓 모두 遊牧生活과 農耕生活을 거쳐, 이제는 삶의 形態가 그 뿐만이 아닌 어엿한 文明國을 이루기 爲해, 지니고 온 文獻을 土臺로 學問과 技術의 再建에 合心해 努力했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敎育하기 위해 세워진 書堂은 초기에는 成人 일사람들 중에도 제대로 工夫를 했던 이들이 드물어, 學生이나 先生이나 같이 文獻을 解釋하며 工夫하는 方式으로 運營되었다. 그리고 生活을 알차게 만드는데 必要한 여러 物件들을 開發하고 만들어내는 硏究黨과 工作黨도 세웠다. 廣惠 一百十五年 아사女皇國의 皇宮 牡丹城은 完工되었다. 사람이 安樂하게 살아갈 便利하고 튼튼한 집을 짓는, 삶을 위해 필요하며 簡單明瞭한 目的의 技術 開發은 그들 後天 人間 모두의 志向하는 바 였으므로, 그들은 지니고 온 文獻을 參考로 이 곳의 風土에 알맞게 設計해 雄壯한 偉容의 皇宮을 곧 어렵지 않게 지을 수 있었다. 皇宮의 一般 建物들은 單層의 기와집이 大部分이나 女皇과 皇世女의 專用 居處인 태화각과 소화각은 여황족의 생활에 필요한 많은 편의시설을 갖추어야 하므로, 충분한 넓은 공간을 덮을 수 있도록 꽃봉오리 모양을 닮은 거대한 돔형의 지붕이 올려졌다. 담장은 숫사람들이 궐 밖으로 나가 말썽을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높고 굳건하게 했다. 牡丹城의 樓閣들의 주위는 온통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연이어 피어나는 꽃들로 둘러싸이게 했다. 그리고 복숭아나무를 사방에 심어 귀순마야희고가 자신의 몸 모양과 얼굴빛을 닮은 이 과실을 정원에 산책 나올 때마다 수시로 따먹을 수 있도록 했다. 가운데 태화각 옆에 있는 큰 연못은 花容池라 하는데 여름철이면 이 곳에서 저녁에 연회를 겸한 대신들과의 회의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특히 삼복의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밤에는 가까운 측근대신들만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황복을 접어 두고 알몸을 연못물 속에 담근 채로 모임을 갖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가끔 기분에 따라 몸을 뒤척거리기도 하는데, 주위를 온통 둘러싼 五色石燈의 흔들리는 조명 아래 반짝이는 그녀의 젖은 몸은, 비취호박으로 細工된 살아있는 女人像이었다. 귀순마야희고는 계속 나이 들어 성숙해 감에 따라 더욱 본격의 여황의 풍모를 갖춰 갔다. 그녀의 회분홍 입술은 점차 짙어져서 보라색을 띠더니, 그녀의 나이가 이백 세 가까이 될 즈음에는 짙은 연지를 바른 듯 핏빛 그대로의 새빨간 색이 되었다. 손가락 마디 하나가 더 있는 듯이 길게 자라나는 그녀의 손톱의 색깔도, 점차 자연스레 물이 들어 짙어지더니 역시 보라색을 거쳐 새빨갛게 되어, 흡사 옛 여인네들이 봉숭아물을 짙게 물들인 것과 같이 되었다. 얼굴빛은 살짝 황색기가 있는 상아색의 피부에 두 뺨에는 紅潮를 띠어, 그녀는 자연 그대로가 마치 매우 화려한 치장을 한 여인의 모습이 되었다. 이 홍조는 그녀가 범인족을 접견할 때나 기타 감정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얼굴 전체로 퍼지곤 했다. 그녀의 백성사랑은 연년이 더해 갔다. 태어난 곳에서부터 주변 뭇사람들을 사랑하며 그들 타인들의 행복만을 염려하며 살아왔던 그녀. 자신과 친하게 지낸 이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자신을 장난삼아 놀래주던 이들, 자신을 홀대하며 업신여기던 이들, 심지어 견디기 힘든 수모를 주었던 이들의 기억 조차도 모두 사랑과 용서의 한방울 눈물에 용해시켰던 그녀로서, 이제 숱한 역경 끝에 어렵사리 얻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그녀의 백성들에 대한 사랑은 어느 정도일까 가히 짐작되는 바 있으리라. 이에 反해 또한 특히나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은 性愛의 차원을 떠나 전 일사람 백성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 아뢰올 말씀이 있사옵니다." 행정관 중의 하나가 어느 날 그녀에게 말했다. "어서 말해 보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짐의 백성들의 사회에서 무슨 문젯거리라도 있나요?" "폐하를 직접 뵙고자 하는 백성이 많습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어찌 그토록 존귀하고 아름다우실 수 있는가 한번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 원이 없겠다는 자들이 너무나 많사옵니다." 귀순마야희고는 당황했다. 전생 인간의 생각으로는 별 것 아닐 듯이 여겨질지 모르지만 그녀는 평소에 그녀를 알현하는 신하를 접할 때에도 자신의 全體가 드러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에 얼굴과 몸이 화끈 상기되곤 한다. 그런데 몇 사람도 아닌 여러 백 여러 천의 사람들에게 自身을 보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이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녀는 오래지 않아 결정했다. "다가오는 새해에 짐이 직접 황궁 앞 광장에서 신년 하례사를 하겠어요."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삶이 모든 백성을 위한 삶임을 알기 때문에 자기 혼자만의 기분은 구애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약속했던 신년 하례식의 때가 왔다. 아사녀황국의 황궁 모란성의 정문 紅花門 앞의 광장에는 그녀를 흠모하는 수천의 일사람 백성들이 모였다. 그들 모두는 약속대로 그녀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전 백성 중에서 별다른 사정이 없는 한 거의 모든 이들이 함께 모여 이 축복에 가득한 이상국의 새해를 함께 출발한다. 쾌청한 겨울 하늘에는 약간의 옅은 흰 구름만 군데군데 떠 있다. 아침해도 높이 돋은 巳時에 이르러, 홍화문의 露臺 위에 간간이 부는 차가운 바람을 녹일 듯한 기운을 풍기며 귀순마야희고는 그녀의 자태를 드러냈다. 순간, "와아!" 팽팽히 드리워져 있는 짙파란 하늘이 찢어지고 아직 풀리지 않은 살얼음 덮인 땅이 갈라질 듯한 함성이 입춘의 황궁 앞 광장을 메웠다. 아사녀황국 여황 귀순마야희고는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머금고 두 팔을 활짝 펼쳐 들어 답례했다. 그녀가 서 있는 동안 처음에 화끈 달아오르던 그녀의 얼굴은 이내 썰물처럼 홍조가 흘러나가더니 창백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것 마저도 보는 이들에게는 조화무쌍한 그녀의 미를 더욱 흠뻑 느끼도록 해 주었다. 얼굴의 혈색이 빠진다해도 입술은 새빨간 색 그대로였다. 본디 그녀 입술의 피부빛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녀를 보는 모든 백성들은 같은 인간으로서 저토록 존귀한 아름다움을 지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면서 새삼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드높일 수 있었다. 군중 속의 한 아이가 옆의 여자에게 말했다. "언니 나 좀 안아올려줘요. 여황폐하좀 보고싶어요." "그럼." 아이의 부탁을 받은 여자는 곧 아이를 자기의 어깨에 무등 태워 주었다. 올려진 아이는 손뼉을 치며 "야! 어쩜 저렇게 예쁠 수가!" 하고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태워준 여인은 아이에게 친절히 설명을 해 주었다. 얼굴 모습으로만 보면 둘은 별 다를 바 없는 아이의 모습들이었다. "저 분이 우리 모두를 만드신 분이란다. 먼 옛날에는 인간이 자신들의 創造主를 눈앞에 볼 수도 없으면서 무작정 섬기곤 했었단다." "정말 그랬어요?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리고 그 때의 창조주는 자기는 실제로 아무런 일도 않으면서 그의 앞잡이인 남자들을 시켜 우리 여자들에게 창조의 힘겨운 짐을 떠넘겼었지. 인간 창조의 공로는 神, 남자, 여자의 순으로 매기면서 그에 따른 짐은 반대의 순으로 졌었던 것이지. 그로 인해 당시의 여자들은 자신의 삶을 살기가 거의 불가능했단다. 어쩌다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려는 여자는 모두 이상한 여자로 몰려 또 다른 고통을 받았고..." "정말 옛날 여자들은 불쌍했겠네요. 우리 일사람들 모두는 여황폐하의 고마움을 알아야겠네요." "그럼. 물론이지." 기쁨과 환희에 충천해 있는 그들은 선천의 시절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신을 섬기던 사람들의 막막한 심정을 동정했다. 그들은 그들 모두의 創造母의 존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눈앞에 볼 수 있는 것이다. 귀순마야희고는 連하여 滿面에 웃음을 띄우고는 다시 오른 손을 번쩍 쳐들어 휘젓듯이 흔들면서 "신년을 축하해요. 여러분 모두 사랑과 행복에 찬 한해를 보내세요!" 하고 광장에 퍼져있는 냉기를 온통 녹일 듯이 소리쳤다. 찬 공기에 엉긴 그녀의 입김이 하이얀 구름안개가 되어 그녀의 앞에서 퍼져 올라갔다. 그녀의 자애로운 외침에 군중들의 감격의 함성은 다시 하늘을 찔렀다. 그녀의 짧은 신년사는 그 말 그대로 듣는 모든 이들에게 그 해 동안의 사랑과 행복이 절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었다. 이 해 광혜 125년부터 귀순마야희고는 그녀를 보고 싶어하는 백성들의 원을 풀어 주고자 매년 정월 초하루 신년 하례식에는 황궁 앞의 광장에 모인 백성들을 위해 몸을 일으켜 주는 관례를 만들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을 내 보이는데 대해 몹시 수줍어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으나 그것은 백성들을 위한 또하나의 베풂이라는 큰 목적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백성을 위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 분을 넘게 서 있지 못하고 이내 받침대를 잡고 주저앉아야만 했다. 그리고는 앉은 자세에서 나라전체의 전년도 살림정산과 새해의 계획을 발표하는 신년하례식의 진행을 참관하지만, 앉아있는 자세도 그녀에게는 부담스러운 것이었으므로 신년하례식에 그녀가 참관하는 시간은 이십여 분이 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의 감정을 극복하고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실제 모습을 나타내어 준다는 것 자체가 매우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식이 진행되어 가는 중에도 대부분의 일사람 백성들은 발표안건 보다는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귀순마야희고의 모습을 보느라고 더 정신이 팔려 있었다. 신년하례식의 전 과정이 끝났다. 귀순마야희고는 坐床에서 일어나 군중들을 향해 다시 손을 흔들고는 몸을 돌아서 퇴장했다. 군중들은 그녀를 들여보냄에 서운해하면서도 땅이 꺼지게 할 듯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로 그녀의 靈光을 기렸다. 그녀를 몇 번 보지 못한 아이들은 다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감탄과 더불어 신기한 호기심의 눈초리까지 더해졌다. "어쩜 저리도 몸이 호리병 단지 마냥 생기셨을까?" "바로 조오기 안에서 우리들이 모두 생겨났었대." 군중의 함성은 군데군데 재잘거림이 섞여 있었다. 돌아서 퇴장하는 그녀의 얼굴은 잠시 다시 발갛게 상기되었다가 이내 창백해졌다. 귀순마야희고는 이윽고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자 미리 그녀 앞에 푹신하게 마련되어 있는 이동침대에, 아름드리 하얀 꽃나무가 무너져 내리는 듯 엎어졌다. 그녀는 그대로 그녀의 거처로 옮기어졌다. 옮겨지고 있는 그녀는 비록 심히 힘들고 부끄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끼는 백성들의 정서함양을 위해 어려운 일을 치른 보람에,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서도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16) 學部大臣 아림 나라는 더욱 융성해 가고 생활은 안정을 찾아갔다. 귀순마야희고는 이제 그녀의 딸 중의 딸인 황세녀로서 키울 여황족의 후예를 갖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광혜 200년 아사녀황국은 황세녀 출산을 위한 황손간택수정식을 거행했다. 황손간택수정식의 형식은 일반 수정식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고 낳은 여자아이들 중에서 여황의 젖가슴에서 나오는 황유를 먹여 여황족으로 기를 아이를 택하는 것이 다르다. 이에 따라 수정으로부터 임신, 출산 시까지 여황의 영양상태를 좀 더 신경써 돌보며 숫사람도 우량종자로 선발된 자들만을 엄선한다. 귀순마야희고는 역시 약 한 달간의 임신 기간 끝에 이백이십 명의 아이를 열흘간에 걸쳐 출산했다. 전생인류시절의 대형 산부인과 병원과 같이 생긴 신생아 보육실에서 그녀는 아이들을 컨베이어 벨트 마냥 생긴 송아대(送兒帶)에 실어 보내게 해서 하나하나씩 자신이 몸소 골라 보기로 했다. 그녀는 반쯤 몸을 일으킨 자세로 앉아 지나가는 아이들을 보고 있다가 한 아이를 발견했다. 눈빛이 초롱초롱하니 꽤나 총명해 보이는 아이였다. "아이 참 깜찍도 해라. 내가 직접 안아 봐야지." 그녀는 이 아이를 택하여 무릎 위에 놓고 곧 이름을 아림(雅琳)이라 지었다. 그런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간택관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폐하 이 아이는 몸이 강건하지 않아 황세녀로서의 간택은 적합치 않은 것 같사옵니다." 사실상 간택의 권한은 간택식(揀擇式)의 담당관들이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의 일생 동안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이 행사를 위해서 이와 관련된 모든 분야의 자료를 평생토록 연구하기만 하는 이 들이었다. 그러나 귀순마야희고는 이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계속 조그마한 아이를 손으로 잡고 무릎 위에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어르고 있었다. 다시 오래지 않아 송아대 위의 아이들의 삼분의 이 이상이 지나갔을 무렵 그들은 한, 골격이 튼튼하고 살이 통통한, 말 그대로 강건해 보이는 아이를 택해 귀순마야희고의 무릎 위에 얹어 놓았다. "폐하, 이 아이야말로 만인의 어머니 될 황세녀로서의 간택에 부족함이 없는 줄로 아옵니다." "으음. 이 아이도 좋긴 하네..." 귀순마야희고도 이들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의 이름은 화자라 하고 이 아이는 황세녀로서 간택되었다. 이제 이 아이는 앞으로 오십여 년 간을 여황 귀순마야희고의 품에서 그녀의 젖을 먹고 자라난다. 그리하여 또 하나의 여황족의 후예로서 키워지게 된다. "이제 간택도 마치어졌사오니 폐하의 백성될 아이는 놓아 보내 주시옵소서." 간택관들은 청했다. 그런데 귀순은 먼저 선택한 아림의 눈에서부터 애틋한 정의 미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간택에서 도중 탈락된 아이는 곧 다른 일반 아이가 있는 곳으로 보내게 되어 있지만 귀순은 이미 자기의 손길이 닿은 이 아이를 쉽사리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귀순은 "이 아이도 내 곁에 있게 하면 어때요? 이미 짐의 손이 간 터이라 정이 들어서 차마 놓아 보낼 수가 없구려." 했다. 귀순의 이 말을 듣고 수석간택관은 귀순에게 말하기를 "폐하. 아니되옵니다. 역사서를 보면 황세녀가 다 자라 한 나라에 모녀 두 여황이 있을 때마다 갈등과 문제가 생겨나곤 했는데 하물며 동기 자매 여황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 여겨지옵니다." 했다. 그러나 귀순은 계속 아이를 쉽게 떼지를 못했다. "내 당분간만 키우다 내보내겠으니 별 문제는 없을 것이야." 귀순은 이렇게 말하면서 한사코 이 아이를 곁에 두려 했다. 수석간택관은 결국 "아무튼 안되는 일이옵니다. 적당히 때를 잡아 폐하의 품으로부터 떼어 내보내야 하리라 이겨지사옵니다." 라고 말하고는 아이를 귀순의 품에 남겨 놓았다. 귀순이 워낙 간청하는 듯이 얘기하니 담당관들도 더이상 문제삼지를 못했다. 단지 귀순에게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반드시 떼어놓겠다는 약속을 하도록 했다. 태어난 순서로는 아림이 언니가 되었다. 둘은 귀순의 거처에서 같이 놀며 어린아이의 시절을 보냈다. 단지 식사시간에는 궁인들이 아림을 따로 돌려 궁궐 밖의 집단보육소에서 인공유아식을 먹게 하고 화자만이 귀순의 품안에서 황유를 받아먹도록 했다. 그들은 날 때부터 그렇게 지내왔으므로 둘은 자연스레 그런 생활을 계속했다. 궁인들은 혹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하며 항시 감시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어린 아림은 어느 날 화자와 놀면서 장난으로 뽀뽀를 하다가 화자의 입가에 묻은 달콤한 액체를 맛보게 되었다. "화자야 그것 참 맛있다. 어디서 먹는 거니?" "응. 우리 엄마에게서 나오는 거야." "나도 먹고 싶다." "그럼 한 번 우리 엄마한테서 내가 먹을 때 와봐." "안돼, 난 식사시간 때마다 궁인 아줌마들이 밖에 데리고 나가는데..." "참. 그렇지..." "무슨 수가 없을까? ..." 아림은 잠깐 생각하다가 눈을 번쩍 뜨고 화자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우린 밥 먹을 때마다 같이 있지를 못하니 어떻게 하냐면 말야. 내가 나갔다 올 때마다 궐 밖에서 아이들에게서 요즘 인기 있고 유행하는 과자를 하나씩 줄께 그 대신 그걸 좀 나한테 줄래?" "그래 그러면 내가 엄마한데 젖 먹고 올 때마다 한 입씩 물어올게" 이렇게 하여 아림은 화자의 입에 묻은 황유를 때때로 조금씩 맛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세월은 흘러 아림과 화자는 열 살이 되었다. 예전의 수석 간택관은 말했다. "폐하, 이제는 아림을 황세녀와 같이 있게 할 수 없겠사옵니다. 황세녀의 입학(入學)의 시기가 닥쳐왔사옵니다." "벌써 그 때가 왔어요? 세월은 정말 유수 같구려." 귀순마야희고는 서운한 마음 감출 길 없었으나 더이상 이것을 막을 명분은 없었다. "아림아. 이제 너는 바깥 사회에서 살아야 한단다." 그녀는 아림을 불러 앉히고 말했다. "무슨 얘기예요? 엄마?" "네가 밥 먹을 때마다 나가는 바깥 일반 사람들의 사회가 있잖니? 이제 너는 다 컸으니 내 품을 떠나 거기서 일반 사람들하고 같이 살아야 한단다." "화자는요?" "걘..." "걔는요?" "걔는 걔대로 앞으로 해야할 생활이 있단다." "엄마. 왜 나는 화자하곤 달리 젖도 안주고 이제와 서는 내보내기까지 하는 거예요?" 아림은 새된 소리로 어머니에게 따졌다. 여느 일사람 아이라면 이 정도의 감정이라도 눈물같은 것은 안 나오고 얼굴이 붉어질 정도일 텐데 아림은 눈시울이 벌써 축축하니 물들어 있었다. 귀순마야희고는 잠시 아무말을 않고 가만히 있다가. "아림아. 너는 그래도 나의 품도 거치지 않고 나간 저 수많은 백성들보다는 큰 행운을 얻었던 것이란다." 하고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다가 이윽고 고개를 돌렸다. 곧 궁인들이 와서 버티는 아림을 붙잡아 데려갔다. 한참동안 어전의 바닥이 떨렸다. 아림이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 건 잠깐밖에 안 되니까 그것 때문이 아니다. 귀순마야희고는 고개를 안으로 돌려 한동안 몸을 움찔움찔 하며 소리없이 흐느꼈다. 이렇게 해서 아림은 어머니와 이별하고 일반 사회로 나왔다. 아림은 이제 여느 일사람들처럼 자기를 돌봐줄 언니를 찾아야 했다. "아림아 너 오늘은 집에 안가니?" 식사 후에도 궁궐로 돌아가지 않는 아림을 보고 같이 있던 아이들은 물었다. "응, 나 오늘부터 나와 살기로 했어. 궁궐에 잔심부름 일은 이제 자동으로 하는 기계가 있어서 안해도 된대." "그것 잘 됐다. 앞으로 우리하고 친구하자." "그런데 어떻게 사는 거지? 앞으로 뭘 하고?" "그건 언니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언니라니? 내가 아는 언니는 궁궐 안에밖에는 없는데..." "아참, 너는 아직 살집을 정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우리하고 같이 가봐. 언니 소개해 주는 곳을 알려 줄께." 아림은 식사 때 알았던 친구들을 따라 국립중개소로 가기로 했다. 국립중개소는 수도의 교외에 위치해 있다. 아림과 친구 어린이들은 길 밖으로 나왔다. 길 밖은 선천시대의 도시의 풍경과 별 다름이 없다. 단지 모든 건물과 길이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반드시 동시에 추구하는 형태로 지어졌다는 것이 다르다. 거리는 번화하고 차량도 숱하건만 모든 건물들은 크던 작건 높던 얕건 간에 선천시대 이곳에 번성했던 인간사회의 고유 건축양식과 비슷하게 세련된 기와지붕에 울긋불긋한 단청무늬로 채색되어 있었다. 귀순마야희고가 무인의 원시지(原始地)였던 이 곳에 정착한지 이제 불과 이백 년에 가까울 뿐인데 어떻게 벌써 이렇게 완전한 문명사회를 이룩해 놓을 수 있는가 의아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선천사회 같으면 생식과 육아 등의 가욋일(加外事)에 얼마나 많은 인간의 정력을 쏟아 붓는가. 얼마나 많은 여자의 잠재능력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묻히고 말았어야 했는가, 얼마나 많은 남자의 잠재능력이 여자와의 문제로 인해 매장되고 말았는가. 후천의 사회에서의 인간 노동력의 효율성이란 가히 선천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음이 있다. 곧 지나가는 한 여인이 차를 세워 그들에게 묻는다. "너희들 어디 가니?" "예. 여기 얘 국립중개소에 데려다 줄려고요." "그래? 아줌마가 데려다 줄 테니까 타라." 이 여인도 물론 자기의 볼일이 있어서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후천시대 사람들의 일에서 남의 일이란 개념은 없다. 더군다나 모두가 돌봐주어야 할 어린이들의 일일 경우에랴. 차는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높다란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교외의 한적한 길로 접어들었다. 곧 푸른 잎사귀 무성한 덩굴로 둘러싸인 정문 안에 앞에는 검소하게 장식한 정원이 자리해 보이는 아담한 이층건물이 나타났다. "아줌마. 잘 가세요." "그래, 좋은 언니 소개받아라." 이 곳은 집단양육과정을 마친 일사람 어린이가 자신을 보살펴 줄 성인 일사람과 한 작은 가족이 되도록 맺어주는 기관이다. 이 맺음의 관계는 선천시대의 결혼과 견줄 수 있는 것으로서 모든 일사람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아림은 담당자의 면접을 받았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림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좀 커 보이는데..." "열 살이에요." "어째 그렇게 많지? 다른 아이들은 대개 네 살이면 집단양육소에서 나와서 유아원에서 대기하다 대여섯 살 이내에 언니와 맺어지고 늦어도 일곱 살까지는 다 자기에게 맞는 사람을 찾아 출가를 하는데..." "전 그 동안 궁궐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동녀(童女)로 있었습니다." 아림은 떠날 때 궁궐에서 시키던 대로 대답했다. "좋아. 좀 늦기는 해도 용모도 준수하고 머리도 총명한 것 같으니 곧 좋은 언니와 맺어질 수 있을 거야." 중개소에서는 아림의 성품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돌봐주고 싶은 동생을 갖길 원하는 젊은 신청자들 중에서 아림을 맡아줄 만한 충분한 학식과 소양을 갖춘 이들을 골랐다. 그리하여 그 중에서 가장 적합하다 판단되는 한 여인을 아림에게 소개해 주었다. 아림을 돌봐주게 된 언니의 이름은 유정이라고 전해지는데 아림이 10세인 당시 25세였다고 하며 직업은 일사람 사회에서의 글월 지어 팔기였다고 한다. 아림은 국립중개소의 접견실에서 유정을 처음 만났다. 접견실은 공공기관의 장소이면서도, 본질이 여성인 그들 일사람들의 취향을 나타내는 듯 세심한 실내장식과 조명이 매우 잘 갖추어져 있어, 전생인간 시절의 여느 분위기 있는 카페 이상으로 아늑함과 포근함을 주었다. 약간의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기다리고 앉아있던 아림의 앞에는 곧 눈이 크고 시원스런 인상의 젊은 여인이 나타났다. "안녕, 난 유정이라고 해." "예, 반가워요. 언니." "참 총명해 보이는구나. 넌 앞으로 뭐할 거니?" "잘 몰라요. 그냥 많은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을 뿐예요. 언니는 뭐 하세요?". "나는? 호홋. 나도 학생 때는 남들로부터 똑똑하다는 소리 많이도 들었었지. 그래서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는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지런히 나서며 다녔단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생활을 위한 별다른 기술을 가진 게 없어 그냥 이런저런 얘기 글월로 써서 여기저기 팔아서 먹고살고 있단다." "저는 나이에 비해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르니 언니가 많이 도와주셔야 하겠어요." "그럼. 자 이제 우리 집으로 가자." 이렇게 해서 유정의 집에서 아림은 성년이 될 때까지 생활했다. 아림은 조금 늦었지만 여황국의 일반 사람들과 같이 교육과정을 밟았으며 자신의 아픈 기억을 딛고 학업에 착실했다. 아림이 바깥사회에 잘 적응되어 살아나간다는 소식은, 성회(聖懷)를 놓아보내 초사(焦思)해 마지않던 귀순마야희고의 은밀한 부탁을 받은 궁인을 통해 그녀에게 전해져 그녀를 기쁘게도 했다. 조금 자란 아림은 유정에게 그녀의 하는 일에 대해 물었다. "언니가 글을 쓰면 어떤 사람들이 읽는데?" "응, 신문이나 잡지 같은데 실리곤 해. 때로는 따로 한 권으로 나오기도 하고..." "그럼 언니의 글을 읽는 사람은 언니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이나 마찬가지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 "우린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씀을 한시간씩 열심히 듣는데... 그리고 열심히 듣고 나면 먼저보다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데. 그렇다면 언니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언니에게서 많이 배우겠네?" "..." "야! 그러면 언니는 우리 학교의 선생님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겠네. 신난다. 친구들한테 자랑해야지..." "풋. 별로 그런 건 아냐. 내 글을 읽는다고 해서 읽는 사람이 뭐 많이 배우는 게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그 사람이 읽으면서 심심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나도 그래서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로 따라서 쓰고..." "응? 이상하네. 난 새로 배우는 것만 아니라면 학교수업 듣는 것은 따분하던데... 배울 것도 없는데 왜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아무튼 그 사람들이 읽고, 또 요구 하니까 쓰는 거지... 나도 달리 별 뾰족한 기술이 없으니깐 그것이라도 해서 먹고살아야 하겠고..." "그래도 좀. 뭔가 비어있는 것 같은데..." "아림아, 언니도 가끔은 속상하단다. 누구 못지 않은 좋은 머리 가졌다고 말은 들어와 놓고는 별로 이 사회를 위해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다고... 그러니 우리 딴 얘기하자 응?" 이렇게 아림은 언니 유정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남들에게 실제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늘 한탄하는 것을 들어왔다. 이에 따라 아림은 더욱 남들에게 정말 도움을 준다할 일을 하고 싶었다. 아림은 초중등의 교육 과정을 거쳐 17세 때에 언니 유정의 축하 속에 국립영재학교에 입학했다. 입학과 동시에 그녀는 다른 동기생들과 함께 국립영재학교 교장으로부터 훈시를 들었는데 이 때 받은 훈시에는 후천시대의 과학기술에 대한 가치관의 전반적인 사항이 잘 집약되어 있어, 이야기의 흐름에는 별 관계가 없지만 이에 소개한다. "여러분은 과학의 길이라는 것이 여타의 인간사(人間事)들과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최근에 일부 무책임한 축성(築城) 책임자에 의한 건축물의 사고(事故) 등에 따른 크나큰 사회문제들을 제군들은 알 것입니다. 본디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자기의 사고(思考)의 편의에 따라 짜여지고 만들어진 것은 자연에 의해 반드시 그 허점이 들추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흥미거리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사고유형(思考類型)에 자연이 따르기를 바라나 자연은 좀처럼 그렇게 되어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인간자체의 뒤바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시대의 과학에 입문하려는 사람들 중에는 일부 옛 공상소설에 현혹되어,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서 하루아침에 유명해지고 큰돈을 번다든가 혹은 어떤 가공(可恐)할 무기를 발명하여 권력을 얻을 수는 없는가 하는 허무맹랑한 기대를 가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제군들은 본교에 입학하는 것을 계기로 이러한 선사시대적 사고방식의 잔재를 없애기 바랍니다. 말하자면 과학을 하려는 이들은 흔히들 진로의 성패를 대발견을 하여 크나큰 영예를 얻느냐 아니면 그냥 뭇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일 없이 평범하게 역할을 마치느냐의 갈림길과 같은 것 마냥 잘못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영예의 가능성을 대기하는 상태 (Waiting for Possible Fame Status)'는 과학의 쌓여온 성과의 누적의 기반 위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사회가치적 허상을 기다리는 것에 불과 합니다. 현실에 있어서 최선이라는 것은 곧 크게 주목받음 없이 무난하게 거쳐가는 것으로서, 오히려 곳곳에서 인간의 사고능력의 허점을 노리는 자연현상의 심술과 싸워야 하는 '사고발생 예비상태 (Preparing for Ocasional Accident Status)'가 곧 과학하는 이들의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모름지기 과학일반은 평준한 들판을 정신없이 달리다가 어느 날 높이 솟은 화려한 봉우리에 오르는 것이 아니고 어디 숨어있을지 모르는 함정에 빠짐이 없이 평원을 무사히 지나오기 위한 하나하나의 조심스런 발걸음입니다. 일전의 대량붕괴(大梁崩壞)나 지하누기(地下漏氣)와 같은 함정에의 추락이 있을 경우에만 주목받는 이들이 과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본교의 입교를 계기로 본격적인 과학기술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여러분들은 과학의 길에 대한 잘못된 환상에 현혹되지 말고 자신이 진정 인류전체를 위해 기여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항상 마음에 새기기 바랍니다." 교장의 훈시는 어려서부터 무언가 모두를 위해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일을 해 보려는 아림의 뜻과 합치했다. 아림은 더욱더 자신의 뜻한 바 포부를 펼치기 위해 학문에 정진(精進)했다. 유정은 때때로 아림에게 당부했다. "아림아, 넌 꼭 이 언니보다는 사회에 보탬되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해." 아림의 훌륭하게 자라남은 언니 유정에게도 기쁨이었다. 유정은 아림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많은 것을 아끼지 않고 아림은 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하니 집안 생활은 행복과 보람으로 차 있었다. 이런 중에도 아림의 마음 속 한구석에는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의 빈칸이 있었다. 언니와의 생활에 행복을 느끼다가도 가끔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녀는 지금의 생활이 무언가 더 있어야할 것이 없는 부족함으로만 느껴졌다. '난 언니한테 불만은 없는데. 우리 집이 다른 애들네보다 못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림은 가끔 궁궐에 남은 동생 화자도 생각났다. 지금의 자기생활이 아무리 이 사회에서는 남부럽지 않은 생활이라 할 지라도 어머니와 지내고 있을 화자의 생활이 부럽기만 했다. 어머니가 그리우면 그럴수록 아림의 마음속은 허전함은 더해 갔다. 아림이 새라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국립영재학교에서 였다. 아림과 새라는 첫 만남부터 서로 마음이 잘 통했다. 둘은 이 우주를 이루는 원리와 인간은 그 안에서 무엇인가 하는 등의 화제로 방과 후 컴컴한 교정의 벤치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토론하곤 하며 꿈같은 절정의 학창시절을 같이 보냈다. 아림은 그와 친하게 되면서부터는 자신을 진정 완전히 행복한 사람이라 여기게 되었으며 어머니와 궁궐에 대한 미련도 어느 정도 잊고 지낼 수가 있었다. 선이 지고 이지적 용모의 아림과 둥그스름하니 귀여운 인상의 새라는 공히 우수한 학업능력과 준수한 외모로 그네들을 아는 교내의 모든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둘은 교내 많은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아림이 어쩌다 자기가 잘 모르는 교내학생과 이야기할 경우가 있을 때에도 그네들은 아림에게 하는 첫인사 대신으로 말하기를 "요새 새라하고 어떠니? 참 잘 지내지? 좋겠다 둘이서." 할 정도로 많은 학생들은 두 사람의 친밀한 교제관계를 그네들의 화제로 삼았다. 새라는 이렇듯 자기네를 선망하는 많은 학생들의 주목을 받으며 그네들하고 같이 어울리기를 즐겨했다. 그러나 아림은 친해지려고 접근해오는 여러 학생들을 오히려 피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교정의 벤치에서 둘만의 대화에 빠져 행복감에 젖어 있는데 다른 학생들이 삼삼오오 다가와 둘만의 대화를 더이상 지속 못하게 하는 것은 그녀에게 참지 못할 분노였다. 결국 그녀는 다른 학생들이 자기들만의 자리에 끼여들면 아예 자리를 떠나버렸다. 아림의 이런 태도가 새라와 그들에게 접근하는 친구들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은 물론이었다. 서로의 사이는 어색해지면서 둘의 교우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친구 새라가 다른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보게 될 때마다 그녀는 절망감과 배신감의 심한 마음의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더이상 두고 볼 수가 없던 나머지 아림은 드디어 말을 꺼냈다. "새라야. 우리 사이에 불필요하게 끼여드는 애들 좀 떼놓자. 우리가 나눌 수 있는 대화의 기회를 자꾸 잃게 되는 것 같애." "어머, 너 참, 별 얘기를 다 한다. 그럼 우리 둘만 깊게 사귀자는 거니?" "아무튼 제발 별로 의미 있는 얘기도 같이 나누지 못하는 다른 애들 때문에 우리의 우정이 흐려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도 물론 아림이 너를 소중히 생각해. 하지만 나는 친구를 넓게 사귀는 것을 좋아해." "넓고... 얕게?" 아림은 넓은 친구관계는 그만큼 얕고 피상적인 의미뿐인 친구이지 않느냐고 새라에게 다그쳤다. 새라는 잠깐 어리둥절한 듯 하더니 웃으면서, "그래. 넓고 얕게. 어차피 서로 다른 사고를 가진 것인 인간인데 서로간에 굳이 깊은 속마음을 털어놓아야만 하겠니? 그래봐야 부담스럽고 피곤하기만 할 뿐이야. 마음을 열고 여러 친구들을 많이 사귀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데. 너두 너무 나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친구들도 많이 사귀어 봐." 하는 것이었다. 아림은 새라의 손을 잡고 다시 말했다. "너만을 진정 생각해 주는 친구는 나밖에 없다는 것을 너는 모르니? 응? 내가 얼마나 너를 좋아하는 지 알아줄 수 없겠니?" 새라는 팔목까지 파고들은 아림의 손을 밀쳐내면서 "또 그러는구나. 그런 건 바라지 않아. 자기 인생은 자기를 믿고 살아가면 될 뿐이야. 그리고 넌 너무 자꾸 내게 손을 대는 경향이 있어. 가끔 친밀감의 표시로 손을 대는 것은 좋은데 이렇게 오래 잡고 있는 것은 느낌이 이상하단 말야." 하고는 아림의 옆을 떠났다. 새라는 아림의 부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다른 여러 친구들과 가까이 지냈다. 다시 아림의 마음속의 빈칸은 생겨나고 그녀의 마음상태는 불안해 져 갔다. 집의 언니 유정은 일도 바쁠 뿐더러 애초부터 같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의 한계가 있기에 아림이 이 일을 상의할 수는 없었다. 밤마다 아림은 끝내 완전한 자기의 사람으로 붙잡지 못하는 새라를 생각하며 지새웠다. 어디 아무도 없는 곳에 그애와 내가 둘이서만 같이 지낼 수는 없을까? 왜 그렇게 할 수가 없단 말인가. 아림은 어느 날, 다시 새라에게 호소했다. "새라야, 나도 나를 따르며 좋아하는 애들은 많아. 그렇지만 난 너만을 내 곁에 두고 싶은 거야. 난 너만을 좋아하니까. 그런데 너는 왜 자꾸 걔네들과 같이 휩쓸리니?" "너는 너무 서로간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러지 마. 너도 널 좋아하는 얘들하고 같이 잘 지내면 되잖아." "네가 그런 생각이라면 우리 아예 같이 지내지 말까?" 아림은 질투심에 못 이겨 화난 목소리로 내뱉었다. "참. 내..." 새라는 아예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같이 있을 때마다 다른 친구들에 의해 훼방되는 것이 괴로와 결국 아림은 일부러 새라를 멀리하고 말았다. 둘의 관계는 더욱 어색해져 그저 같은 학급동료로서 가끔 필요한 말만이 오갈 뿐 사실상 학기초의 진한 우정은 퇴색되고 말았다. 이러는 중에 이윽고 전 교과과정 수료의 시기가 다가왔다. 아림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연구개발과제의 수행에 들어갔다. 전산기의 구조에 대해 가르치는 하란(霞蘭) 선생의 시간이었다. 가는 테의 안경에 호리한 몸매에 지적인 용모의 그녀는 교단에서 학생들을 둘러보며 한 질문을 던졌다. "전산기에서의 원반기억장치(hard disk)와 중앙처리장치(CPU)는 우린 인간에 비한다면 무엇과 비유될 수 있을까요? 자 이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학생은 말해봐요." 이 때 새라가 나섰다. "원반 기억장치는 받아들이는 정보를 저장하는 일을 하므로 사람의 기억력에 해당하고 중앙처리장치는 사고력에 해당합니다." 선생은 다시 새라에게 물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원반기억장치의 용량이 크고 작은 것과 중앙처리장치의 처리속도가 빠르고 느린 것은 사람에 비유하면 무엇과 같다 할 수 있을까요?" 새라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원반기억장치의 용량이 큰 것은 사람으로 치면 자신의 지나온 기억을 낱낱이 잘 기억하는 사람 즉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고, 중앙처리장치의 속도가 빠른 것은 사람으로 치면 이른바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 즉 자기 앞에 닥친 문제에 대해 즉각적으로 신속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역시 새라야말로 우리 학교의 최우수생다워요." 선생은 칭찬하고 학생들도 선망의 눈길로 새라를 보았다. 하란선생은 다시 학생들을 향해 물었다. "그럼 전산기의 주기억장치(RAM)는 사람의 무엇에 비유될 수 있을까요?" 새라는 "그것도 사고력에 해당되지 않을까요?" 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하란선생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모두를 둘러보며 "혹 다른 사람 없어요?" 하고 다시 누군가 대답해주길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윽고 한 학생이 "새라도 잘 모르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하니 하란선생도 씩 웃고 "그래 그럼 나중에 얘기하지 이 문제는..." 하고는 모두에게 말했다. "여러분에게 과제를 주겠어요. 개인용 소형 전산기를 하나 씩 만들어 오는데 그 성능의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아요. 여러분의 집에 있는 전산기에는 나날의 일과를 영상으로 담아 기록하는 기능이 있지요? 거기에 연결해서 데이터를 받아내고는 같은 배경이 있는 날들을 찾아내 자기의 평소의 일과생활이 어느 장소에서의 어떠한 행위가 위주로 되어 있나 분석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정도면 됩니다. 소프트웨어는 미리 있는 것을 써도 좋고 새로 만들어도 좋고. 과제물 제작은 정해진 비용 한도 내에서만 할 수 있어요. 자 그럼 다음 주 이 시간에..." 아림은 과제물을 만들면서 새라와 같이 하고 싶었다. "새라야 우리 같이 상의하며 만들어보자." 모처럼 아림이 말을 건네자 새라는 곧 반가이 받아주었다. "응. 그래 먼저 영희, 미애, 순자도 같이 하자고 했으니 다섯이서 같이 만들어보자." "아니 우리 둘이서..." "너 또 그러니?" 새라는 딱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어쩔 수가 없다 여기고는 더 말을 않았다. 아림은 결국 혼자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새라가 다른 친구들과 정답게 말을 나누는 것조차 보기 괴로왔다. 다음 주가 되었다. 하란선생은 각 학생들이 과제로 만들어 온 소형전산기들을 살폈다. "잘들 작동되나 시험 좀 해 보고 왔니?" 그러나 학생들은 별로 자신 있는 대답이 없었다. 선생은 학생들 자리 사이로 들어와 여기저기 둘러 봤다. "이것 뭐야. 제대로 된 게 별로 없네. 쓸데없이 원반장치의 용량만 크고... 데이터는 외부로부터 받으니까 그럴 필요는 없는 거 아냐?" 선생은 새라의 곁으로 왔다. "새라의 것은 원반장치는 알맞게 작은 걸로 쓰고 그걸로 절약된 비용으로 중앙처리장치를 고속의 것으로 했구나." "예. 정보를 분석하는 기능은 사고력의 기능이지 기억력이 아니잖아요. 기억력에 해당하는 부분은 외부에서 해결해 주니깐." "그래 맞아. 그런데 잘 되니?" "어떤 날 것은 잘 분석하는데 어떤 날의 것은 읽고 동작하려다가 멈추곤 해요." "어디 여기서 다시 해 보자." 선생은 학습실 전산기의 수업영상기록 자료를 새라가 만든 전산기로 처리해 보도록 했다. "음. 역시 속도는 꽤 빠르구나." 그러나 새라의 것은 얼마 안 가 동작을 멈추어 버리는 것이었다. "중앙처리장치를 고속의 기종으로 하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어." 그리고는 다시 다른 학생들의 것을 둘러보는데 문제를 아예 손도 못 댄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새라와 같이 한 학생들만 새라의 것을 같이 흉내 냈을 뿐이었다. 선생은 아림의 옆으로 왔다. "어디 한 번 아림이의 것도 시험해 보자." 우선 만들어진 형태를 훑어 본 선생은 "아니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식이야. 이렇게 잘 만들어질 수가 있나." 하고는 다시 아림의 것으로 아까 했던 시험을 했다. 과연 아림의 것은 학습실 전산기에 있는 영상 자료를 훌륭히 처리해냈다. "아림아 네가 만든 것에 대해서 설명해 봐." "아니오. 나중에 보고서로 쓸게요. 지금은..." 아림은 그냥 넘어가 달라고 하란선생에게 말했다. "그러지 말래도. 자기가 아는 것을 발표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도 중요한 공부야. 어서 한 번 네가 만든 것이 어째서 이렇게 적은 제작비용으로 다량의 정보처리를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지 설명해 주려무나." 선생의 다정하면서도 엄명과 같은 말에 아림은 할 수 없이 자기의 과제수행에 대해 모두에게 설명했다. "나날의 영상정보기록은 대용량의 데이터이며 이것을 처리하며 각 날의 장면들을 비교해 상호간의 공통점을 추출하는 것은 상당히 복잡다양한 계산량을 요구합니다. 말하자면 심층적(深層的)인 연산(演算) 동작을 요구합니다. 단순한 다회(多回)의 반복연산시에는 중앙처리장치의 속도가 그대로 효과를 보지만 이 경우에는 연산과 동시에 임시 결과 값의 계속적인 관리가 요구됩니다. 그래서 저는, 본래 이 과제물의 제작요구사항(specification)은 정보저장의 기능은 외부에서 대신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또한 정보처리의 속도에 대해서는 무리하게 요구된 바가 없으므로, 원반장치와 중앙처리장치를 최저가의 것을 사용했습니다. 반면에 이로 인해 절약된 비용으로 주기억장치 용량을 최대한으로 늘려, 일과(日課) 기록 영상정보처리가 가능한 일반 상품전산기의 수준으로 했습니다. 전산기의 주기억장치의 충분함은 한 번에 복합 심층적인 연산처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 인간으로 비유한다면 복합적 의미를 가진 사물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할 수 있는 사람 즉 생각이 깊은 사람에 비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산기의 주기억 장치가 인간의 깊은 사고에 비유된다는 것은 지난 번 수업시간에 선생이 질문했을 때 아림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때 나서지지가 않았다. 자신이 연정(戀情)을 가지는 친구를 위해 아림은 학기초와 변함없이 일부러 자신을 낮추면서 항상 친구에 버금가는 위치인 양하며 지내왔었다. "정말 훌륭한 해석을 해주었어요. 여러분 아림학생에게 박수를..." 하란선생은 활짝 웃는 낯으로 아림을 모든 학생들 앞에서 치하했다. 이 후로 하란선생은 수업시간마다 아림이 모든 이들 앞에서 자기의 ㅃ어남을 감추지 말고 나타낼 수 있도록 그녀를 독려했다. "아림이는 진정 우리들의 최우수생이었구나. 여태 그걸 몰랐다니." 아림의 연구 능력이 사실은 새라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동료학생들은 아림에게서 많은 것을 얻고자 그녀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오늘 우리 같이 저녁이나 하면서 얘기 좀 하자." 그네들은 아림과 어찌해서라도 만나고 이야기할 기회를 갖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아림은 까닭없이 "아냐 생각 없어." 하고 거절했다. 아림이 최우수생으로 인정받음에 따라 먼저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던 새라는 동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아림은 새라가 혹 소외감을 가질까 염려되어 다른 동료들과 가까워지기를 꺼렸다. 그녀의 마음속은 어찌하면 새라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돌릴까의 고민만으로 차 있었다. 결국 아림과 가까이 지내려하던 학생들은, "쳇, 저애는 뭐 저래. 우리와 같이 어울릴 줄도 모르고..." "얘들아 우리 쟤하고는 상대하지 말자." 하면서 아림과 멀어졌다. 이제 아림은 동료들의 의도적인 기피대상이 되었다. 다시 동료들은 새라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새라는 이제 되찾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아림을 멀리 했다. 아림은 이후로 국립영재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동료들로부터의 의도적인 따돌림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자기의 생각으로는 분명 아무런 악의를 가지지 않고 친구를 위하는 마음만으로 지냈음에도 왜 이러한 지경에 이르러야 하는가는 그녀를 매우 괴롭게 했다. 이렇듯 아림의 바깥생활은 비록 겉으로는 순조로운 듯이 보였지만 교우관계와 정서생활의 면에서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자신의 이 특정인 집착의 편향이 어떻게 말미암은 것인지 알지 못했다. 졸업을 앞둔 아림은 고통스러운 학교생활에서 벗어나 마음의 안정을 찾아보고자 혼자 여행을 가기로 했다. "언니, 나 좀 여행 좀 떠나려고 하는데. 졸업하기 전에 잠시 마음을 정리 좀 하려고..." "그래? 네가 요즘 통 학교도 안 나가고 말이 없고 우울하기만 한 것 같은데 한번쯤 기분전환을 좀 해보는 것도 좋겠다. 그런데 어디로 가려고 하니?" "남쪽으로 가 보려 하는데. 언니" "거긴 기분 좋게 쉴 만한 곳이 마땅치 않지 않니? 옛날 선사시대에 그곳은 선천인류가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하는 곳이 있는데 하도 환경파괴가 심해서 우리가 다시 개척하기를 포기한 곳이란다. 가봐야 보기 흉한 옛날 건물 부스러기들밖에 없을 텐데. 차라리 북쪽 바닷가가 좋지 않니?" "난 사람 많이 모이는 곳은 싫어. 사람들 사이를 떠나려고 여행을 가는데 왜 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엘 가? 난 별로 볼 건 없지만 그냥 사람들이 없는 곳엘 가고 싶어." "네가 가고 싶다면 가야지. 오히려 너처럼 탐구심 많은 애는 혹시 그 곳에서 옛날 문명의 잔해들을 보다 보면 좋은 계기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구나." "언니 한달 정도만 갔다 올게요." "그래. 차 정비 잘하고 차에서 나올 땐 야생동물들 조심하는 걸 잘 명심해야 한다. 호신용구도 잘 챙겨 갖추고 가거라." "알았어요. 언니." 젊은 여자 혼자 떠나는 여행이지만 후천의 시대에서 사람을 조심하라는 인사말은 그다지 필요치 않다. 아림은 아사녀황국 건국 이전부터 전래되어 온 소형 다방향쌍무한궤도차를 몰고 남쪽 땅으로 여행을 떠났다. 인적이 드문 곳을 때로는 차를 몰고 가고 때로는 차를 세우고 한가로이 거닐면서 그녀는 지친 마음을 달랬다. 아림은 계곡물이 흘러나오는 한 그리 크지 않은 산의 기슭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물가로 가서 바위 위에 앉아 잠시 동안의 사색에 들어갔다. 저 앞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바삐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동물들은 다들 혼자서도 잘 살아가는 것 같은데 어째서 인간은 이렇게 남들과 부대끼며 마음의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왜 원하지도 않는 많은 사람들과 자꾸 어울려야 하는 것이지? 나는 오직 한 사람만을 마음에 두고 그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훨씬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느껴지는데...'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끼리의 사회가 없다면 인간도 저 다람쥐나 토끼들처럼 매일같이 먹을 것을 찾아 바삐 헤매기만 하는 생활을 할 것이고 이렇듯 편리한 문화생활을 누리지는 못할 거야. 그리고 저들은 한 마리 한 마리가 새끼를 낳기 위해 저토록 생산적인 일에 할애할 노력을 버리고 있지.' 바로 밑에 개미들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아. 개미. 하나 하나로 보면 메뚜기나 거미보다 나을 것이 조금도 없는 존재들. 그러나 이렇게 모여 삶으로 인해 그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이루고 있구나. 이들은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식을 위한 노동력의 손실이 있지도 않고 서로가 집단의 왕이 되려고 하는 다툼도 하지 않는다. 이러기에 다른 암수생식의 불안정한 집단을 이루는 동물보다 훨씬 안정된 사회를 이루고 있다.' 아림은 날이 더운 것을 느끼자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지고 물로 뛰어들었다. 후천시대 일사람의 여름옷은 이러하다. 윗도리는 몸의 체온 유지에 필요한 만큼의 소매 없는 셔츠이며 정장(正裝)일 경우에는 조끼와 비슷하게 생겼다. 아림은 먼 여행을 떠나 온 경우라서 조끼와 같은 상의를 걸치고 있었다. 하의는 그냥 짧은 치마이다. 그것은 여성적인 매력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겨울에는 바지형태의 옷을 많이 입기도 하지만 여름에는 치마의 형태가 통풍 등의 효과로 인해 더욱 편리하기 때문이다. 치마는 자리에 앉거나 물건을 조금 많이 나를 때 등에 편리하게 이용된다. 물론 치마 안에는 더이상의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우며 건강에도 좋지 않은 추가의 착용물은 있지 아니하다. 아림은 맑은 물에 몸을 담그고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서로서로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연녹색의 투사광을 비치는 나뭇잎들 사이로, 들이치는 햇살이 약간은 눈부시면서도 그런 대로 바라보기에 좋았다. 매끈하게 빠진 그녀의 몸이 물에 젖어 드문드문 비치는 햇빛에 반짝였다. 그녀가 얼마간 기분 좋게 자연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아얏! 어마." 아림의 오른쪽 발가락이 아팠다. 보니까 유리조각이 아림의 발가락을 찔러 피가 났다. 아림은 얼른 상처난 발을 물위로 올리고 유리조각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조그만 손거울이 부서져 있는 것이었다. 아림은 그것을 손에 집어들고 물위로 나왔다. "참 작게도 만들어져 있다. 이런 건 아마 선사시대 유물일 것 같은데...." 아림은 깨진 거울조각이 붙어있는 반대편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림을 보았다. 그것은 한 여인과 그녀가 안고 있는 아기의 모습이었다. "이 모습은 옛날에 나의 어머니셨던 우리 여황폐하의 모습을 많이 닮았네. 그런데 안고 있는 것은 아기는 아긴데 왜 이렇게 크지? 아기는 여황폐하의 손바닥만해야 할 텐데..." 조금 생각하던 아림은 "아 참. 이건 아주 오래 된 선사시대 유품이지. 그렇다면 우리가 말로만 듣던 인간의 개별양육 시대의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아림은 한참동안을 그 조그맣고 흐릿한 그림을 들여다봤다. 밖에 나오니 상처는 곧 아물었다. 아림은 치마를 둘러 입고 조끼를 걸쳤다. 그리고는 다시 차에 올라타 저 아래 회색의 건물 잔해가 우거진 수풀 사이로 숱하게 눈에 띄는 곳을 향해 갔다. 이러한 선사시대의 유적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라도 여황국시대의 사람들은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후천개벽시절의 과거 역사 말소 이후로 사람들은 애써 과거의 일을 들추려고는 하지 않는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단지여황국의 역사만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일 뿐이다. 아림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왠지 이들 유적에 관심이 갔다. 그녀는 조그만 공터에 차를 세워두고 가까이 보이는 큰 건물의 잔해로 다가갔다. 이 때 "푸르륵." 아림이 부서져 있는 건물의 한 칸에 들어가 보려 하자 그 안에 은신해 있던 멧돼지 한 마리가 불쑥 뛰쳐나왔다. "아앗." 아림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 다시 그 짐승이 방향을 돌려 자기를 향해 습격해 오자 아림은 슬쩍 옆으로 몸을 피하면서 품에 있던 은장도(銀粧刀)로 짐승의 목 급소에 일격을 가해 간단히 처치했다. 아림은 일사람들 중에서 그다지 몸이 날랜 편도 아니다. 오히려 문약(文弱)한 체질이라 조금 둔한 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생육을 위한 가진(各種) 부대기능(附帶技能)이 생략되고 오로지 삶의 능력만을 위해 몸이 발달한 후천시대 일사람들 중의 하나이기에 이토록 신속한 대응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휴우." 아림은 들어가 보려던 곳으로 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새끼 여러 마리가 젖을 먹이던 어미가 없어지자 갈팡질팡하며 울고 있었다. "아아. 이런." 아림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달리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어찌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서 아림은 '아아 이렇게 새끼들을 저마다 따로따로 기르니까 이와 같은 위험에서도 대처를 못하고 당하고 마는구나. 역시 인간의 양육방식이 만물의 영장답다. 어느 누가 철저한 보호 속에 자라나는 인간의 자손을 해할 수 있으랴.' 하며 새삼 인간의 자손양육방식이 얼마나 발전된 형태인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안에는 많은 선사시대 유적이 흩어져 있었다. 대부분은 지금도 쓰이고 있는 물품들이었다. "응. 선사시대에도 전산기 비슷한 것이 있었네. 한번 보자." 아림은 구석에 비닐로 싸여 있던 조그만 컴퓨터의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나 물론 작동되지 않았다. "아참. 전기를 넣고 수리를 해야지." 아림은 차에서 전기를 뽑아오고 공구와 재료를 가지고 와서 컴퓨터를 수리했다. 비닐 속에 단단히 싸여 있던 것이라 그토록 오랜 세월에도 그나마 보존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만 조금씩 새어든 공기로 인해 웬만한 연결선은 다 부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천 인간의 뛰어난 실용과학 기술수준의 여건에서 게다가 과학분야 전문인 아림에게 있어 그 수리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아니 수리라기보다는 자신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일반 재료소자들을 가지고 그 구조를 본떠 다시 만드는 것이다. 아림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 안에 저장된 정보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반나절을 걸려 수리하니 선사시대의 전산기는 다시 쓸 수 있었다. 안에 있던 여러 가지 모양의 원반들 중에 다른 원반들에 있는 정보는 다 없어졌지만 그 중에 얇고 반짝이는 원반만은 정보를 해독(解讀)할 수가 있었다. 오랜 세월 꼭꼭 숨어 깨지지 않은 채로 있었던 화면기(畵面器)에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는 곧 거기에 영상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한 여자가 나왔다. 아림이 보기에는 물론 여황족의 모습이었다. "으음. 아직 어린 황세녀이구나 이렇게 서서 잘 걸어다니는 것을 보니..." 아림은 중얼거리며 계속 화면을 응시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친구인 듯한 여럿을 만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응? 황세녀가 이렇게 많을 수가 있나?" 그러다 아림은 곧 다시 깨달았다. "아! 이것은 바로 선천의 인간들의 모습이구나." 아림은 다시 흥미를 가지고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자 화면이 정지하고 한 구석에 갈쿠리에 방울 하나가 달린 그림이 떠올랐다. 아림은 "음. 좀 동작시켜주라는 뜻이겠구나." 하고 무조건 자판에 있는 가장 넓은 키를 눌렀다. 그러자 화면의 중앙에 있는 여자가 앞으로 걸어나오며 확대되었다. 그리고는 웃저고리를 벗었다. 다시 갈쿠리가 나오고 아림은 넓은 키를 쳤다. 여자는 옷을 또하나 벗었다. 몇 번 반복하니 여자는 완전한 나체가 되었다. "우리 여황폐하보다는 못하지만 제법 아름답구나. 배경을 보니 몸 크기는 일사람들과 같은데 몸매는 일사람보다는 여황폐하에 가깝게 생겼다." 아림은 중얼거리면서 계속 컴퓨터를 동작시켰다. 여자는 소파 위에 누웠다. 그리고는 손을 자기의 하체에 갖다 대었다. "응? 저긴 오줌이 나오는 곳인데. 닦으려면 수건을 가지고 하던가 물을 뿌리거나 할 것이지 맨손은 왜 갖다 댄담?" 여자는 손을 갖다 대었다. 조금 있다 손가락 두어 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손을 떨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손이 상하로 격한 왕복운동을 했다. 아림은 불현듯 자기도 흉내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곧 치마를 들추고 손을 아래로 밀어 넣었다. 조금 불결한 느낌이 들었지만 아까 방금 물 속에서 목욕했으니까 별 상관없겠지 하면서 손을 될 수 있는 한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컴퓨터 화면의 여인의 동작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아아. 음마야." 생전 느껴보지 못한 쾌감에 절로 나지막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한동안 정신없이 따라하다 보니까 "지직." 하고 이 오래된 선사시대의 유물은 더이상 화면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림은 '음. 이 반짝이는 얇은 원반만 가져가면 되겠다. 예나 지금이나 정보의 저장은 色과 空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구나. 그러면 우리 현대의 전산기에도 이 시대의 정보양식을 따른 해독 장치만 해 놓으면 볼 수 있을 거야.' 하고는 원반을 소중히 주워 챙겼다. 그리고 주변을 뒤져 같은 모양으로 생긴 반짝이는 원반을 몇 개 더 주웠다. 아림은 더 많은 것을 수집해 오고 싶기도 했지만 애초에 여행의 주목적은 자연을 더불어 쉬고 싶은 것이었으므로 이 정도로 하고 이곳 폐허의 지역을 떠났다. 계속해서 바닷가 등을 돌아보며 마음을 정리한 뒤 아림은 집으로 돌아왔다. "무사히 잘 왔구나. 아림아." "응. 언니. 많은 걸 구경했어. 특히 선사시대의 유물을 수집해 왔는데." "선사시대? 역시. 그래 어쩌다 네 연구에 좋은 힌트를 줄 수는 있을 거야. 하지만 이미 의미를 잃은 그 유적들에 너무 관심 둘 필요는 없어. 그런 건 찾아 볼래면 우리 동네 뒷동산에도 있어.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진 말아 후후." "언니 조금 있다 재미있는 거 보여줄 테니까 기다려." 아림은 집에 있는 전산기에다, 가지고 온 원반의 정보저장양식을 따른 해독 장치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먼저 여행지에서 보았던 그것을 다시 틀었다. "언니! 이리와 봐. 이것 재밌어." 유정은 아림이 부르자 아림의 방에 들어와 바로 그 여자가 자기의 손을 움직이는 장면을 보았다. "이게 뭐야? 이건 어떤 불순한 불평불만분자들이 우리 여황폐하의 모습을 가지고 장난 노는 거야. 이것 버려." "아녜요. 이건 선사시대, 즉 선천인류시대의 생활상의 한 단면이에요." "그럴 리가..." "언니 내 말을 못 믿어요? 폐허에서 찾아낸 것이어요." 아림은 이미 치마를 들추고 화면상의 동작을 흉내내고 있었다. "굉장히 기분 좋아요. 해 봐요. 언니." "응? 그게 뭐니? 불결하고 망측한데." "씻고 와서 해보면 좋을 거예요." 언니 유정은 일상사에서 재미를 못 느끼고 살아오는 편이었다. 그나마 아림이 가끔 자기는 생각지도 못한 기발한 이야기를 해주든가 재미난 물건을 만들어 보이든가 하는 것으로 낙을 삼아 왔었다. 따라서 그녀는 비록 좀 멋쩍긴 해도 아림이 말해주는 대로 화장실에서 하체부를 씻고 아림의 옆에 앉았다. 그녀의 몸은 아림보다 더 매끈했다. 유정은 아림이 하는 대로 따라 해 보았다. "언니, 어때? 기분 아주 좋지?" "..." "안 좋아?" "별론데... 저 화면에 나오는 대로 더 하기만 하면 아프기만 할 것 같아." "이상하다. 난 아주 재미있는데." "호홋. 넌 원래부터 특이하지 않았니? 그냥 남들이 이해 못하는 짓이나 하고. 너나 잘 놀렴. 너무 심하게 하지는 말아라 응." 유정은 그만 하고 나왔다. 그녀는 아림의 남들에겐 별나 보일 다른 행동들에 대해서도 집안의 언니로서 이해해 주곤 했다. 아림은 유정이 나간 뒤에도 한참을 보고 흉내내다가 화면 속의 진행이 다 끝나고 나서 조금 피곤했는지 이 행위를 그쳤다. 그리고는 다른 원반들을 살펴봤다. "응? 아까 저건 빨갛게 칠해 있는데 이것은 녹색으로 칠해 있네." 바꿔 넣으니 이번에도 여인의 모습이 나왔다. 그런데 아까의 여인처럼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고 수더분한 생김새에 몸이 몹시도 뚱뚱했다. 그리고는 여러 사람이 둘러있는 앞에서 통으로 된 옷을 홀랑 벗고는 가운데 드러누웠다. 둘러선 사람들은 초록색의 천으로 온 몸을 가리고 눈만 내놓고 있어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있다 그 뚱뚱한 여자의 하체부가 클로즈업되었다. "앗 저긴 아까 그 쾌감을 주던 곳 아냐? 그런데..." 거기가 조금씩 벌어지더니 그 곳에서는 아기가 나오는 것이었다. "아! 바로 저것이 선천시대의 아기 낳는 모습이구나. 그런데 왜 그리 힘들게 낳지?" 아기 낳기까지의 여자의 고통스런 과정을 지켜 본 아림은 과연 말로만 듣던 선천시대 여인의 힘겨웠던 생활을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애써 낳아놓고 그 공로는 남자와 신에게만 돌렸었구나. 정말 불쌍하다 옛날의 여자들은..." 아림은 새삼 다른 일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만백성의 어머니 귀순 여황폐하에 대한 고마움이 다시 일어났다. 비록 자신은 도중에 품을 떠나오는 슬픔을 겪었지만 만인을 위해 출산의 무거운 짐을 혼자 떠맡은 여황폐하의 마음을 좀더 달래 드리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화면 속의 아이가 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가운과 두건을 쓴 자들에 의해 여자의 품에 안기어 졌다. 그러자 여자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를 안고 있었다. 무심코 화면을 바라보던 아림은 갑자기 화면 속의 여인이 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먼저 번에 그냥 화면을 보고 따라 하던 것 이상으로 이번에도 똑같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흉내 낼 수 없음은 물론이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상상하는 수 밖에 없었다. "어. 내가 왜 이러지? 저 불쌍한 전생인류의 여인이 뭐라고..." 아림은 자신도 모르는 수수께끼를 또 얻게 되었다. 그녀 자신도 도무지 자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림은 자신의 이러한 정서적 불안정 속에서도 마음속의 순수한 뜻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그녀도 졸업과 함께 본격적으로 일사람들의 사회에 나가게 되었다. 졸업 후에 학문의 길을 계속하고자 하는 그녀 앞의 진로는 세 가지 길이 있었다. 첫째는 자연과학의 근본이해를 위해 매진하는 것이고 둘째는 기존의 이론을 어떻게 인간 사회에 실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게 하는가를 연구하는 것이고 또하나는 자기가 습득한 지식을 차세대에 전수시키는 역할이 있었다. 첫번째의 진로는 일견 참으로 흥미 있는 것이긴 했다. 그러나 자연현상의 근본이해에 대한 여러 이론은 이미 선천시대의 모든 것이 그대로 전승되어 있고 그 위에 덧붙일 만큼 덧붙여져서 이제 남은 것은 우주자체의 생성원리 등 학자마다 저마다의 가설이 분분한 것들뿐이었다. 인간이 선형함수(線形函數)의 발걸음으로 진리를 캐내려 다가가면 어느 새 진리라는 것은 지수함수(指數函數)로 내달아 버렸다. 결국 이것은 자칫하면 명예를 위해 실리성(實利性)을 등한시하는 과학이외 여타의 몇몇 분야에 다를 바 없을 수 있다고 판단되었다. 많은 졸업생이 첫번째의 이상(理想)을 어느 정도 포기하면서도 우선 나아가고자 하는 진로가 세번째의 진로였다. 이것은 일단 자리를 잡으면 여생을 안락하게 보내면서 그다지 서운치 않은 사회적 지위도 누릴 수 있기에 대다수의 바램은 가능한 한 차세대 학술전수(學術傳授)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학술전수의 직을 원하는 이들은 많은데 그러한 사람이 필요한 곳은 적어 이른바 학술전수직 종사자들의 상당수는 학술전수(學術傳受)의 뜻이 없는 학생들 앞의 형식적인 자리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언니 유정으로부터 받은 영향과 입학 때의 훈시로부터 받은 감화 등에 결과하여, 이미 이루어져 있는 이론적 성과의 인간사회를 위한 유익한 활용의 연구 즉 실학(實學)의 길로 나서기로 했다. 그녀는 국립실용기술연구소에 취직했다. 이 곳에서 역시 연구개발 업무를 충실히 계속한 그녀는 점차로 실용학술연구분야에서 우수한 역량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곳의 근속기간 중 그녀의 업적 중에 두드러진 것은 예로부터 이론으로만 이어 내려온 초정밀 과학기술 여러 가지를 실제 활용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아림은 초경량밀폐건축기술(超輕量密閉建築技術)의 개발에 의해 이제까지 호기심에 의해 무작정 왔다갔다 하기만 했던 달을 휴양지로 쓰게끔 했다. 자기들이 살고 있는 땅 이외의 곳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여황국시대의 사람들에게서도 밤만 되면 하늘에 떠 보이는 달은 호기심과 궁금증을 줄 수밖에 없었다. 아림 이전의 과학기술자들은 전래된 문헌을 토대로 발사기와 우주선을 만들어, 달에 우주선을 보내는 개가를 올렸었다. 그런데 처음 달에 사람을 보냈을 때는 전국민이 열광했으나 예닐곱 번 갔다 오기만 하고 나서는 무작정 왕복의 무의미함 때문에 달 탐험 계획은 예산을 더이상 책정할 수 없어 중단되고 말았다. 아림은 이러한 사정을 알자 매우 안타까웠다. "달에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조립식 밀폐건축기술을 개발해서 원격 조종에 의해 달에 건설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아림은 이렇게 발표하고는 달 탐험 계획 재개를 당국에 요청했다. 사실 이제까지 탐험의 그럴듯한 명분이 없어 중지되었던 것이지 다시 시작하기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아림은 계속해서 발사되는 우주선에 초경량 밀폐건축 자재를 싣고 가도록 해 그 곳에서 재조립하도록 했다. 다섯번째 우주선의 달 파견 인력은 거기서 조립주택을 완성해 시험적으로 약 한 달 동안을 살아 보고 성공적으로 달의 휴양소 시설 건축 완료를 보고했다. 이후로 세상사에 얽매어 과중한 정신적 부담을 지고 있는 이 들이 말 그대로 지구를 아예 떠나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는 장소로 달은 자주 이용되었다. 아림은 또한 이제까지의 바퀴에 의한 차보다 훨씬 안락한 무륜저상차(無輪低床車 : Wheelless Low Floored Van)를 개발했다. 이 차는 차체내의 적응자극증폭대응장치(適應磁極增幅對應裝置)의 지구자기장(地球磁氣場)에 대한 척력(斥力)을 이용해 땅 표면을 자기부상열차(磁氣浮上列車)처럼 미끄러져 가는 자동차로서, 그 모양은 둥그스런 차체에 방향조정 꼬리날개가 달려 마치 넓적한 몸체에 앞날개가 없는 비행기와도 같았다. 무륜저상차는 곧 대형의 아름다운 장식의 차체를 가진 여황용으로도 제작되어 황궁에 진상(進上)되었다. "폐하, 황실전용의 새 차가 제작되어 진상되었사옵니다." 귀순마야희고는 수행관(隨行官)으로부터의 보고를 들었다. "지금 쓰는 것도 불편은 없는데 웬 일이오? 어떤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요?" "이번에 새로 개발된 차의 추진력은 지구의 보유자력을 이용한 것이라 하여 어떠한 험한 지형을 지난다 하더라도 미끄러지는 듯한 안락함을 느낄 수 있으며 비행기와는 달리 정숙성, 안전성, 무공해성을 지니고 있다 합니다." 비행기란 기구는 이들 사회에서는 그 사용이 극히 제한적이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 이외의 넓은 곳에 대한 정확하고 체계적인 정보가 없으므로 관제소 같은 것도 없다. 그러므로 잠깐동안의 근거리 오락용으로만 가끔 쓰일 뿐이다. "그럼 어디 한번 보도록 하지요." 귀순마야희고는 신개발 차를 맑은 봄볕 아래의 태화각 앞뜰에서 볼 수 있도록 하기를 청했다. 곧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릴락 말락하게 나더니 여황용 무륜저상안락수레가 미끄러져 들어와 그녀의 앞에 섰다. 일반 소형 무륜저상차보다는 다섯 배 정도 긴 차체에 상하개폐식의 문이 달려있고 분홍계통의 꽃무늬로 도색(圖色)된 새 차의 운전을 맡은 일사람은 안에 들어앉아 있는 채로 그녀에게 "폐하 어서 시승해 보시옵소서." 하고 승차를 청했다. 차의 상하개폐문이 위로 들려지자 귀순마야희고는 그녀를 위해 안에 마련되어 있는 45도 각도의 좌석에 앉았다. 수행원 세 명이 같이 탔다. 그러자 이 차는 앞 뜰 위를 달리는 것 같기는 한데 풀잎 스치는 소리 하나 나지를 않았다. "이건 비행기 아녜요?" 그녀가 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수하(手下)가 아닌 일반 백성들에게는 하대(下待)의 말투를 쓰지 않는다. 그녀가 묻자 운전을 맡은 안내자는 말하기를 "비행기와는 다르옵니다. 전적으로 자기(磁氣)의 힘을 이용한다는 것이 다릅니다. 전혀 연소작용에 의한 에너지를 쓰지 않습니다." 하고는 다시 속력을 내었다. 차는 곧 태화각 앞뜰을 벗어났다. "철도도 있지 않은데 어떻게 이렇게 갈 수 있지요?" "지구가 가진 고유의 자장(磁場)과 차체가 나아갈 방향을 고려해 변화하는 차체내의 전자석(電磁石)의 자극(磁極) 간의 반발력이 자성증폭장치(磁性增幅裝置)에 의해 강하게 증폭되어 자기부상(磁氣浮上) 현상을 일으키어 나아갑니다. 따라서 웬만큼 험한 지형이라도 지상으로부터 30센티 내지 50센티의 높이를 유지하면서 이 차는 미끄러지듯 정숙하게 달릴 수 있게 됩니다." "참 안락하고 좋은 차네요. 가장 큰 장점이라면 무엇이 있죠?" "비행기는 추락 등의 위험이 있지만 이 차는 그럴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앞의 장애물을 운전자가 혹 모르고 가더라도 차내의 자석은 지구상에 접해 있는 모든 물체를 지구자석의 일부로서 간주하므로, 차체와 장애물과의 척력이 생겨나서 저절로 피해 갈 수밖에 없어 매우 안전합니다. 게다가 전혀 공해를 일으키지 않으니 이보다 더 좋은 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귀순마야희고는 황궁의 뒷산을 한 바퀴 도는 시험주행을 안내자와 함께 마친 뒤에 태화각 앞뜰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의젓하게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여황용 무륜저상안락수레를 보고 "참으로 훌륭한 자동차이다. 이것이 내가 고향을 출발할 때 있었더라면 훨씬 더 이 나라의 건국을 앞당겼을 텐데..." 하며 "이것을 개발한 이가 누구라고 했더라?" 하고 새삼 되물었다. 수행관은 대답하기를 "아림이란 국립실용기술연구소 직원의 창안이라고 하옵니다." 하면서 품에 지니고 있던 관련기사 등의 자료를 보였다. 귀순마야희고는 보도사진을 보고 그녀가 이전에 품에서 자랐다가 떠나보낸 딸이란 것을 확인했다. 그녀는 곧 수행관에게 명했다. "그녀를 내게 들라 이르라." "분부거행 하겠사옵니다." 수행관은 대답하고는 곧 아림에게 사람을 보내어 궁중에 들라 전했다. 이렇게 해서 귀순과 아림은 거의 사십 년 만에 모녀상봉을 하게 되었다. "고맙다 아림아 이렇듯 훌륭히 자라 다시 보게 되다니..." 귀순은 나직이 아림에게 말했다. "어... 아니 폐하 황공하옵니다." 대신들이 모여있는 공적인 자리에서 황세녀나 부를 수 있는 여황에 대한 '어머니'의 호칭은 용납 못되었다. 아림은 그리던 자신의 어머니를 만난 감격에 엉겁결에 나온 말을 곧 접어두고 나라의 지존에 대한 예를 취했다. 귀순은 소리를 가다듬어 정식으로 옥음을 전했다. "그대를 우리 대쥬신 아사녀황국 온 백성들의 생활복지향상을 위한 신기술 개발의 정책을 입안(立案)하는 신설 부서인 학부의 대신으로 임명하노라."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림은 관직의 영예는 차치하고 그리던 자신의 어머니와 같이 있게 되었다는 데에 무한한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이렇게 하여 젊은 시절을 통해 성실히 업적을 쌓은 아림은 여황국의 학술분야를 관장하는 직책인 학부대신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아사녀황국은 아림의 크고 작은 연구개발 업적의 힘을 입어 더욱 부강하고 번창했으며 귀순마야희고도 자신의 한 때의 기른 정마저 깃든 아림을 총애했다. (17) 새라와 영화 아사녀황국이 반도에 정착해 생활하게 된 지도 꽤 오래되었다. 살림의 마당이 넓어짐에 따라 근방에 미리부터 자리잡아 살고 있었던 주변의 나라들과도 국경을 마주하게 되어 그들과의 빈번한 협상과 교류의 필요성이 생겨나게 되었다. 주변 나라들도 나름대로 자기네들의 영향권을 확대하며 침투하려 하는 성향이 있었으므로 이들 주변 나라들로부터 자국의 세력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 귀순마야희고의 여황국은 이제 자신들의 삶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기존의 여러 일 뿐만 아니라 이웃간의 세력경쟁에 관련한 일에도 적잖이 신경을 써야만 하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들이 건국을 위한 여정에서 지나왔던 길의 남쪽에 있는 광활하고 기름진 벌판에 위치한, 여황 시알뉘와샤오졔(喜兒女 少姐)가 다스리는 큰 나라 楚覇姬女皇國은 여간 경계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 아림과 같이 아사녀황국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주요 인물들이 있었는데 바로 새라(新羅)와 영화(英花)였다. 아림의 친구였던 새라는 그후 아림과는 별다른 교제가 없었다. 그녀는 아림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녀는 활달하고 모험심이 강해 軍務에 종사해 군부대신의 자리에 올랐다. 군대 업무라고 해서 싸워서 상대방을 죽이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나라의 종족과 세력의 유지라는 大命題를 위한 전반적인 업무에 충실할 뿐이다. 광혜240년 초패희여황국 여황 시알뉘와샤오졔의 使臣 란잉(蘭英)이 그들의 다른 주변국가와 마찬가지로 아사녀황국도 그들에게 해마다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하며 찾아왔다. 손님에 대한 예를 다해 아사녀황국 대신들은 그녀를 영접했다. 그녀의 청에 따라 여황의 배알이 이루어졌다. 머리 위를 묶어 모자와 같이 장식한 차림새의 그녀는 귀순마야희고의 앞에 당당히 나서며 말했다. "우리 초패희여황국은 대시조 희영대시녀황의 법통을 이은 중화국(中華國)으로서 해동(海東)의 귀국(貴國)의 건국을 축하하며 반겨 마지않는 바입니다. 이제 해마다 귀국의 특산물을 아국(我國)의 여황 시알뉘와샤오졔 폐하께 진상케 하여 서로의 우의를 돈독케 하고 싶습니다." 귀순마야희고는 이 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지만 그녀의 성품에서는 어떤 단호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 바삭바삭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살짝 미소만을 머금은 채로 "예. 우리가 먼저 사신을 보내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미안해요. 란잉 족하(足下)를 위해 오늘 저녁 만찬을 베풀 터이니 잘 드시고 내일까지 우리의 말씀을 전하기로 하지요." 라고 대답하고는 새라를 바라보며 "새라 공(公)이 손님을 잘 대접해 주세요." 했다. 이 일의 해결에 대해서는 군부대신 새라에게 기대하기로 했다. 저녁에 사신 일행을 대접하기 위한 만찬이 열렸다. 연회장을 가득 메운 연등불 아래 아사녀황국의 멋들어진 노래와 춤이 소개되었다. "해동국의 가무(歌舞)는 마음에 파고드는 것이 있어 참으로 좋습니다. 그런데 가락이 좀 단조롭습니다. 춤의 의상도 채도(彩度)가 덜하고..." 란잉은 그들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평을 했다. "아국의 내력을 더 자세히 아시면 이해하게 되시겠지만 오랜 세월에 거친 역경과 고초로 인해 아국의 국민들은 근심이 끊일 사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노래와 춤에도 그것이 배여 있습니다. 가무를 할 때에도 그 즐거움에만 빠져 원초적 미학을 추구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새라는 이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계속 아사녀황국의 이어온 내력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소리꾼과 춤꾼들은 모처럼 바다 건너까지 자신들의 솜씨를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의식했는지 더욱 열심히 그들의 기예(技藝)를 선보였다. 예술은 그 놓인 환경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들의 노래와 춤은 먼 옛날 선천시대 이곳에 자리한 부족의 그것과 너무도 비슷했다. 단지 다른 것은 배(倍)로 다양한 그들의 의상과 감정표현이었다. 한참동안 흥이 고조되어만 가더니 무용수 들은 하나 둘 몸가득히 치장한 의상을 모두 벗었다. 인간본연의 면모에 대한 근원적(根源的) 고찰(考察)의 표현을 하기 위해서 였다. 이렇다 할 돌출부 하나 없이 매끈하기만 한 그들의 육체가 휘황한 조명 아래 반짝거렸다. 그들의 노랫소리 또한 콧소리 숨소리가 자유로이 뒤섞여 인간감정의 다양함을 자유자재로 나타내었다. 한 마디로 순수예술적 인간표현이 제한받을 어떠한 이유도 그들에겐 없었다. 만찬의 흥은 더해 가는 중에도 나라를 대표하는 두 대신들은 서로 대화가 깊어지며 각기 자국의 입장에 관해 더욱 상세한 이야기를 교환했다. 란잉은 다시 자기네 나라의 오랜 역사와 이른바 정통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새라는 다시 말했다. "희영대시녀황의 시화녀황국은 여황 희영27세가 직계상속자를 낳지 못하고 승하하였기에 당시의 향희녀황국(香姬女皇國) 청하(靑霞)16세의 밑으로 병합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향희녀황국도 청하24세에 이르러 마찬가지 이유로 인해서 상희녀황국(裳姬女皇國)의 만옥(慢玉) 19세에 병합되었고... 법통을 이은 여황국이란 있을 수 없어요." "그들을 계속 승계해 이은 나라가 바로 우리란 말이에요. 우리 나라는 후천개벽의 그날부터 내리 삼만 년을 이 땅에 자리잡아 대대로 이어 온 정통국(正統國)이니 귀국에서는 우리 시알 여황폐하께 예를 보이실 것을 권하는 바예요."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단지 희영대시녀황 이래로 대륙을 시계방향으로 돌고 왔을 뿐이지 여황국의 법통을 이은 것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요. 우리의 건국은 귀측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생각할 것이 아니니 섣부른 평가는 말아주세요." 새라는 건배를 한 잔 청하고 난 뒤에 가다듬어 말했다. "란잉공, 내 귀공(貴公)과 함께 귀국의 여황폐하를 알현해 우리 나라에 대해 이야기 해드려 보는 것이 어떻겠어요?" "글쎄. 음. 일단 한번 같이 가 보도록 하지요." 란잉은 그러잖아도 아사녀황국 측에서 한번 방문이 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쾌히 응낙했다. 새라는 두 나라의 올바른 관계정립을 위해 란잉과 함께 초패희여황국으로 건너가 보기로 하고 만찬을 마쳤다. 다음 날 새라는 출발했다. 가는 길은 서남의 해안으로부터 뱃길로 서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란잉이 타고 온 배편으로 새라는 몇 안 되는 수행원만을 데리고 란잉 일행의 귀국 길에 동행했다. 배 위에서도 새라와 란잉은 서로 자기나라의 이야기를 하면서 논쟁의 꽃을 피웠다. "해동국의 귀순 여황 폐하께서는 어찌 그리 발이 크십니까? 발을 자라게 할 영양분으로 히프를 더 키우시는 것이 종족번성에 더욱 좋지 않을까요?" "글쎄요. 조금 유리하긴 하겠죠. 하지만 우리 귀순 여황 폐하는 일년에 한 번 이상은 우리 일사람 백성들의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고취시키시기 위해 백성들 앞에서 그 아름다운 몸을 일으켜 보이신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귀순 여황 폐하의 큰 발이 아사녀황국 백성들을 위해 매우 요긴하게 쓰이는 것입니다." "어머, 그럴 수가... 부끄러우시지 않나요?" "물론 그러하시죠. 그러나 백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하시는 분이에요." "우리 일사람들이야 그냥 놔둬도 제각기 다 잘 살아가지 않아요? 여황폐하가 아이 많이 낳아주는 것 말고 달리 해줘야 할 일이 뭐 있을까요?" "육신(肉身)을 만들어 주었으면 그만큼 정신(精神)도 살찌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은 모르겠네요." "저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해요. 그러나 아국에서 여황폐하는 아이 낳아주는 것 말고도 우리 일사람 백성들에게 매우 귀중한 분이신 것만은 확실합니다." "여황폐하 귀중하지 않은 나라가 있나요? ..." "정신적인 면에서도 말입니다." "...? ..." 둘은 뱃머리에서 앞의 바다를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왼쪽에 서 있던 새라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며 팔을 뻗어 멀리보이는 물줄기를 가리켰다. "어머, 저길 보세요. 물이 희게 뿜어 올라오고 있죠? 고래인가 봐요." "정말 보이네요." "참 위용이 대단해요. 우리가 땅위를 다스리듯 고래는 바다를 예로부터 다스린다고 봐야겠죠." "그런데 고래의 아랫문과 여황족의 하성문(下聖門)은 어느 쪽이 더 클까요?" "글쎄, 아무리 그래도 고래의 것만큼이나 하겠어요?" "우리 시알 여황 폐하의 것은 더 클걸요, 아마. 호호." "아이, 참. 아무리 그럴까... 호호." 어느 덧 배는 란잉의 초패희여황국의 해안에 다다랐다. 포구에는 측면에 사륜월주월쾌차(四輪越走越快車)라고 쓰여 있는 그들의 사신 접대용 차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이 차는 납작하고 기다란 유선형의 몸체에 가운데가 불룩 솟아 있고 그 안에 6명 정도가 탈 수 있는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새라와 란잉은 같이 올라탔다. "이 차의 이름은 어떤 뜻이죠?" 새라가 운전자에게 묻자 운전자는 대답하기를 "바퀴의 지면과의 마찰열과 엔진의 열 등 주행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열을 차 후미의 축열지(蓄熱池)에 모아둡니다. 그리고는 열이 충분히 쌓이면 부가에너지로서 방출해 차를 가속합니다. 그러므로 달리면 달릴수록 적은 연료로 쾌속주행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온 지는 얼마 됐습니까?" "한 이천 년 전쯤엔가일 겁니다. 숙정(淑淨)이라는 과학자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훌륭하네요. 몇 년 전까지의 아국의 교통수단과 비교하면..." "몇 년 전이라니요. 그럼 지금은 어떻다는 얘기지요?" 옆에서 듣던 란잉이 물었다. "아참 란잉공께 보여드렸어야 하는데... 아직 많이 생산되지는 않았답니다. 새로운 무공해 차가 개발되었거든요. 다음기회에 보여드리도록 약속하죠." 얼마 안되어 새라와 란잉은 초패희여황국의 황궁 아방궁(雅芳宮)에 도착했다. 아방궁은 기나긴 세월을 증축하고 재건한 터이라 그 웅장화려함은 이루 말 못할 정도였다. 새라는 란잉의 안내를 받아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시알뉘와샤오졔는 모황 쟝메이뉘와(張美女 ) 24세가 최근 986세에 붕(崩)하여, 국상을 치러 화화릉(嬅花陵)에 영구(永久) 국보예체(國寶藝體)로서 안장하고 난 뒤에, 즉위한지 이제 겨우 2년 되는 139세의 어린 여황이었다. 초패희여황국의 어전에서 새라는 시알뉘와샤오졔를 만나 예를 보이고 난 뒤 "우리 아사녀황국의 건국에 이르기까지는 귀국에서 깨닫기 어려운 우여곡절이 많습니다. 폐하께서는 소신의 말씀을 들어주시기를 감히 여쭙나이다" 라고 청했다. 울긋불긋하기 이를 데 없는 황상(皇床)위의 시알뉘와샤오졔는 몸 전체를 굵은 금실로 둘러 장식했으며 머리 위에는 노리개 실 장식이 주렁주렁 달리고 비취구슬이 알알이 박힌 부채꼴의 금관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양 눈자위가 불그스레하고 속눈썹이 바깥까지 길게 삐져 나왔으며 새카만 밖 눈썹은 양옆으로 치켜 올라가 있어 무척이나 강한 인상을 주었다. 흡사 전생인류 시절 그녀의 영토가 위치한 곳의 부근에서 행해지던 경극(京劇)이라는 공연물의 단역분장(旦役扮裝)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새라에게 말했다. "어서 말해 보시오. 우리는 대대로 삼만 년을 이 자리에서만 살다 보니 당신들의 여행담은 흥미가 끌리지 않을 수 없구려." 새라는 정좌를 하고 그녀에게 귀순마야희고의 고향 출발에서부터 건국까지의 역사를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말해 주었다. 시알뉘와샤오졔는 듣다가 가끔씩 눈을 번쩍 뜨기도 하고 간간이 "저런! 쯧쯧." "아니! 어쩜. 그럴 수가!" 하면서 새라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시알뉘와샤오졔도 역시 극단여성(極端女性)으로서의 여황족인지라 그녀는 새라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 눈시울이 더욱 붉어지고 훌쩍거리며 새라에게 말했다. "아국이 너무 귀국의 지나온 고초를 알지 못했던가 봐요. 단지 이 근방에 먼저 자리잡았다는 것만을 너무 내세우기만 하고. 짐(朕)은 앞으로 이곳과 이곳 부근의 기후와 살아가는 방식 등 이곳에 자리잡아 터득한 모든 정보를 귀국에게 까다로운 조건없이 제공해 주도록 하겠어요. 그 대신 귀국에서는 대를 이어 대륙을 이동해 살아오면서 겪고 얻게 된 폭넓은 경험과 지식을 아국에게 들려주도록 해요." "존경하는 시알 여황 폐하의 후덕에 감사하옵니다. 정착의 경험과 방황의 경험은 상호보완적인 것이니 어느 쪽도 상대방에게 자측(自側)의 기득권을 주장한다는 것은 합당치 아니하온 줄로 아옵니다." "잘 알겠어요. 귀순 여황 폐하께도 나의 안부를 전해주고 앞으로는 우리 서로 잘 도와가며 지내도록 해요." 새라는 이렇게 성공리에 면담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 이후로는 귀순마야희고의 아사녀황국은 시알뉘와샤오졔의 초패희여황국과 원만히 우애와 선린의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공으로 새라도 역시 귀순마야희고의 총애를 더욱 받게 되었다. 아림과 새라의 동기출생으로서 일사람 영화가 있었다. 영화는 어려서부터 전산기의 사용을 즐겨해 아사녀황국의 모든 정보처리를 담당하는 정보부대신(情報部大臣)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이제까지 국가의 대소사를 치를 때마다 시행착오에 의한 예산낭비가 심하다는 것을 알고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큰 규모의 일을 실행하기 이전에는 우선 한 번 전산기에 의한 가상실험을 해 보는 장치를 개발했다. 이 장치는 국가예산의 절감효과가 막대하여 그녀 또한 귀순마야희고의 이상국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 대신이 되었다. 어느 날 영화는 어전에서 자신의 신개발 장치인 도시개발 가상실험시스템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날이 번창해 가는 아사녀황국의 신도시개발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매우 긴요한 것이라고 하여 모두들 기대가 큰 것이었다. "설명 드린 바와 같이 이 시스템을 이용하면 신도시의 교통량이 앞으로 몇 년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신도시의 적정한 도로망 건설의 규모 등을 미리 가늠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창백한 얼굴에 금테안경의 영화는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영화 공, 잠시 이리 가까이 와 주시겠소? 짐이 친히 자세히 묻고 싶은 것이 있소이다." 귀순마야희고는 영화를 살짝 가까이 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바로 앞에 온 그녀의 귀에다 입을 가까이 대고 살며시 확인하여 묻기를 "영화. 그대가 만든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무엇이든지 '실제 해보면 어떨 것이다.' 라는 결과를 보여줄 수가 있단 말이지?" 했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실제로 실험해 볼 때의 막대한 경비의 부담을 덜 수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면.. 음..." "무엇이옵니까? 폐하." 귀순마야희고는 매우 수줍어해진 얼굴로 머뭇머뭇 했다. 귀순마야희고가 한 동안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녀의 입김이 영화의 옆얼굴을 덮어 영화의 뺨은 후끈 달아오르고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영화는 습기에 짜증이 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귀순마야희고는 손을 입가에 대면서 살짝 속삭이기를 "숫사람과 나와 같은 크기라면은 어떻게 될까 한 번 알고 싶은데..." 했다. 이 말에 영화는 무슨 소린가 한 동안 어리둥절했다. 그러다가 피익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폐하도 참. 엉뚱한 생각을 다하십니다 그려. 아니 좀 징그럽기도 하군요. 배와 배꼽이 같은 크기라면 어떻게 될까 실험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니, 그 그냥 한번 농담으로 심심해서 했을 뿐이야." 귀순마야희고는 부끄러워 얼굴이 발개지면서 더이상 말을 않고 얼른 얼버무렸다. 영화는 속으로 생각했다. '참 주책이시다. 사람이 무조건 오래만 산다고 좋은 것은 아니구나.' (18) 아림의 情分 아림은 학부대신 임명 후 優良種人 개발 방안 및 실례 연구를 위한 학회 행사에 초청 연사로 참석하게 되었다. 대회장은 전생인류 시대에 있었던 여느 학술대회와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그녀는 단상에서 우량종인 개발 과제의 意義에 관해서 연설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나라는 지금 선천의 전설시대와 후천의 역사시대를 통틀어 가장 모범적인 국가를 이루어 발전해 나가고는 있지만, 아직도 그 백성의 수효가 충분히 많지 못해 기존의 이웃 나라들과의 세력경쟁에서 위축될 위험이 다분히 있어요. 이러한 때에 보다 강력한 생식력과 우수한 유전형질을 갖춘 숫사람들을 집중육성해 차세대 민족의 우량화를 도모한다는 것은 실로 뜻깊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겠어요." 아림은 致辭를 끝내고 연단 뒤에 일렬로 위치한 초청인사석에 앉았다. 이어서 각 학교 연구팀들의 연구 결과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 차례는 바로 이 학술대회의 메인 이벤트로서 우량 종인의 實例로서의 숫사람들이 직접 나와 선보이는 차례이다. 곧 이어 다섯 명의 숫사람들이 나와서 일렬로 늘어섰다. 그들은 단지 展示를 위해 나온 자들이므로 일절 말을 한마디하는 경우는 없었다. 사회자가 그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맨 왼쪽의 돌쇠는 기초체력의 면에서 뛰어난 형질을 보유했고 그 다음의 길동은 민첩한 행동능력으로, 세번째의 철수는 선량한 심성으로, 네번째의 영수는 숫사람으로는 드물게 보이는 知的능력으로, 그리고 맨 오른쪽에 있는 강쇠는 우수한 생식능력으로 각기 우량종인으로 선발되었어요. 이들의 우수형질을 종합해 차세대 우리 겨레를 길러낸다면 우리 나라는 틀림없이 부강한 나라가 될 거예요. 저도 그렇게 믿거든요." 사회자는 자기도 이들의 모습이 흡족한 듯 신이 나서 청중들에게 수다스럽게 얘기했다. '아앗! 이들은... ' 아림은 이 때 이들 다섯 명을 보고 예전부터 자신에게 무언가 알 수 없게 있었던 허전함 감정의 공백이 메워지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는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이전에 주변의 친구들 중 어느 특정인에게로 자주 집착하곤 했었지만 그들과 무한정 가까워지기는 한계의 벽이 있었다. 또한 그들과의 만남에 있어서도 그녀 감정의 완전한 충족감에는 이르지 못했었다. 예전에 선천시대의 기록 원반에서 조금 남자를 보기는 했었고 궁궐 내의 숫사람에 대해서도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이제 직접 가까이 보고 나니 비로소 이전에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생전 처음으로 그녀 정서의 포만감이 느껴졌다. 아림은 그 중에서도 맨 마지막에 소개된 강쇠에게로 더욱 느낌이 갔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는 달리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그녀는 가만히 이 행사를 지켜보면서 학술발표회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발표회가 끝난 후 아림은 주최측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리고 담당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이들 숫사람들에게 따로 연락취할 방법은 있나요?" "아림대신님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숫사람들은 어전 내실관리 담당관들의 승인을 얻어 연구자료제공의 목적으로 특별외출을 허가 받아 데리고 나온 겁니다." "음. 나도 연구를 좀 하려 하는데..." "그러면 제가 한번 연락해 드릴까요?" "그래 고마워요. 차세대 우리 겨레 번성을 위한 생식력 강한 종인 육성을 위해 내가 한 번 강쇠를 연구해 보고 싶다고 내실관리 담당관들에게 말해주세요." 아림은 간단히 자신의 서명이 든 서신도 써 주면서 부탁했다. 다음날 아림이 자신의 집무실 겸 연구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젊은 일사람 병사 두 명이 강쇠를 데리고 들어왔다. "아림대신님, 일주일간의 연구목적위탁 허가서 입니다." 병사 하나는 서류를 내보였다. 서류봉투에는 허가서 외에도 숫사람을 다루기 위한 주요 지침도 있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 유사시에는 同封된 초소형 마취 총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방법도 적혀 있었다. "내실관리청에서는 조수를 두어 명 보내드릴까 하던데요. 괜찮으시다면 그냥 저희가 맡아드릴 수도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아녜요. 괜찮아요. 전 필요없어요. 자 수고했어요." "그럼. 감사합니다. 이만들 가겠습니다." 그들은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런데 어서 그들이 가기를 기다리고 있던 아림은 이윽고 그들이 떠나자, 그러잖아도 두근거렸던 가슴이 쿵쾅 뛰기 시작했다. 아림은 몸이 후들후들 떨리면서도 우선 차분히 강쇠를 보고 앞의 손님접견용 소파를 가리키며 "저어기..., 앉아." 했다. 강쇠는 좀 어리둥절했다. 그냥 실험용 침대에 얌전히 누워 며칠동안 잠이나 자라는 것이 이제까지 연구조사를 받을 때의 경우였는데 이번은 좀 의외였다. 강쇠는 자리에 앉았다. 그를 두고 무슨 안건을 논의할 것은 아니므로 아림은 일단 자기의 책상에 가 앉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이내 일어나 강쇠의 맞은 편의 소파에 와 앉았다. 계속 안절부절 하다가, 다시 일어나 강쇠가 앉은 옆자리로 옮겨앉았다. 그리고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말하기를 "너의 우수형질을 증명하는 부위의 형태 관찰을 좀 해보자." 했다. 강쇠의 옷은 내려졌고 아림은 일단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좀 더 자세히 관찰하려면 저기 실험실로 갈 수밖에 없겠구나. 자 가자." 강쇠는 순순히 아림을 따라 실험실로 갔다. 그리고 중앙의 테이블 위에 아림이 지시하는 대로 탈의하고 누웠다. 아림은 옆의 실험작업용 걸상에 앉았다. 그리고는 테이블 옆의 강력 조명스탠드를 켜서 강쇠의 주요부를 다시 세밀히 관찰했다. 한동안 지켜보던 아림은 이제는 손을 내밀어 그의 주요부를 觸撫하기 시작했다. 강쇠는 이전에 다른 곳에서 관찰을 받을 때에는 그냥 자세와 위치 조정을 위해서 연구관들이 가끔 손으로 잡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번의 경우는 이해가 안되었다. 자세와 위치에는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으면서 무작정의 작위적 마찰만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아림대신님 이런 관찰은 처음입니다. 좀 이상한데요." 갑작스런 질문에 아림은 잠깐 멈칫했다. 그러다가 다시 말소리를 가다듬어 얘기했다. "아. 그건 보다 세밀하고 정확한 관찰을 위해서는 視覺에 의한 정보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야. 아까 내가 조명을 환하게 켜 놓고 네 몸을 촬영하여 시각적인 자료를 수집했듯이, 지금 내 손에 연결된 神經波 전송 장치를 통해, 즉 觸角에 의해 너의 우수형질에 대한 더욱 심도 있는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중이란다." 한참동안의 촉각정보 수집이 끝났다. 이번에는 아림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강쇠의 하부에 가까이 접근시켰다. 그녀는 입은 다물고 있으면서 들릴 만큼 크게 숨소리를 내며 더욱 가까이 가는 것이었다. 역시 강쇠가 이상하다고 묻자 아림은 그 자세를 계속 유지하면서 얼른 대답했다. "시각과 촉각만으로는 부족해. 마찬가지로 嗅覺에 의한 정밀 자료 조사가 절실히 요구되기 때문이야." 강쇠는 이제 더이상 묻지 않았다. 그냥 순순히 아림이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림은 이번에는 그녀의 口腔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림대신님 점점 더 이상해지네요. 이번에는 정말 이전에는 느껴보지 않은 묘한 기분인데요." "별것 아니다. 시각, 촉각, 후각만으로는 부족하다. 味覺에 의한 정밀 관찰이야말로 인간형질의 탐구에 가장 긴요한 것이란다." 강쇠는 아직도 뭐가 뭔지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뭔가 의미는 통하는 듯 순순히 아림에게 자신을 내맡기었다. 그도 기분이 별로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둘은 저마다의 기분에 취해 잠시 동안의 시간을 저희들 마음대로 소리도 내면서 보냈다. 이윽고 조금 지친 듯 강쇠의 가슴 위에 옆으로 머리를 기대고 쉬던 아림은 다시 말했다. "완전한 관찰을 하려면 五感을 다 동원해야하는데 아직 聽覺에 의한 것은 충분히 하질 못했어 네가 좀 도와주련?" 그녀가 귀를 강쇠의 입 가까이 대자 강쇠는 그녀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하려는 듯이 입을 움직이다가 이내 아림이 원하던 그대로의 동작으로 들어갔다. 다시 처음부터 반복하여 한참 동안의 유희가 끝나고 그들은 휴식에 들어갔다. 아림의 연구실은 숙소도 겸하고 있다. 아림은 강쇠를 위해 식사와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저녁에 조금 남은 일을 마치고는 그와 함께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강쇠가 옷을 입으려 하자 아림은 그를 제지했다. "안돼! 아직 연구는 끝나지 않았어." 하고는 오히려 자신의 옷을 모두 벗었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이번에 너에 대해서 어느 누가 했던 연구 이상으로 철저한 연구를 하려고 하거든. 그러려면 아까 했던 다섯 가지 감각에 의한 철저 조사도 물론 중요했지만 이제는 나의 몸 자체로 너를 받아들여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 자 내가 자세를 해 보이겠으니 한번 나에게 네가 들어와 봐." "아니 어떻게 제가 아림대신님의 몸안에 들어간단 말입니까?" "몸 전체가 아니라 주요부만... 이란 말야 이 답답한 친구야." 아림은 강쇠의 앞가슴을 손으로 툭 치고 웃으면서 속삭이듯 가벼운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는 눈을 살짝 흘겼는데 그 눈매는 제법 전생인류의 고혹적인 여성과 유사했다. "아림대신님 거기는 오줌이 나오는 곳 아닙니까?" 兩脚間의 각도가 鈍角을 이루며 침대 위에 있는 아림에게 강쇠가 말했다. 아림은 답답해 짜증이 난 듯 찡그리며 다시 강쇠에게 핀잔주었다. "자세히 봐. 바보야. 우리 여황폐하의 것과 닮은꼴이잖아? 모양이 다른 데가 어디 있어? 너도 여황폐하를 접할 때에는 서로 입력해 보려고 다툼하는 숫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니니? 그런데 지금 경쟁자도 없이 너 하나만을 위해 열려 있는데 무엇을 망설이고 있니?" 강쇠는 얼마 동안 그냥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아림이 손을 뻗쳐 그의 下部에 연달아 자극을 주자 이윽고 그의 하부도 강한 반응을 나타내면서 아림에게 다가가 아림의 원하던 바대로 그녀의 위로 엎드렸다. 그 뒤로는 비록 어색하지만 선천시대의 너무나도 흔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아림은 이날 자기의 일평생 쌓였던 응어리를 푸는 꿈같은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는 역시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같은 행위를 강쇠와 함께 했다. 아림은 자신의 집무실에 걸려 있는 여황 귀순마야희고의 사진이 마음에 걸렸다. 그 아름다움은 그녀에게 질투심까지 유발하게 했다. 여황의 모습을 보고 질투심을 갖는다는 것이 일사람으로서는 정상이 아닌 것임은 물론이다. "나도 한번 모습을 우리 귀순 여황폐하와 비슷하게 만들어 볼까?"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오후의 여가를 이용해 인체와 어울릴 수 있는 색소개발을 시도했다. 숱한 경이적인 기술개발의 경력이 있는 그녀로서는 이러한 물질의 개발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그녀는 반나절이 못되어 자기의 모습을 여황과 비슷하게 하는 각종 물질을 실험실의 약품으로 합성조제했다. 그것은 흡사 미술품을 만들기 위한 도구와 같이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졌다. 입술에 바를 붉은 색의 塗料는 크레용과 같은 막대형태로 만들어졌고, 손톱에 바르는 것은 그림물감을 붓으로 찍어 바르듯이 하도록 되었다. 눈가에 그리는 것은 검은 연필과 같이 만들었으며 얼굴색을 여황과 비슷하게 하는 데에는 가루로 된 뽀얀 분홍 색소를 뿌리는 방식으로 했다. 그리하여 강쇠와의 애정행위를 하기 전에 꼭꼭 자신의 얼굴을 治粧했다. 아림을 이 행위를 化粧이라고 이름했다. "강쇠야, 어떠니? 내 모습이." 초저녁 첫 화장을 하고 나서 아림은 누워 자는 강쇠를 깨우면서 물었다. 강쇠는 처음에는 깜짝 놀라는 듯이 보이다가 다시 찬찬히 훑어보고는 말하기를 "아림님, 처음 보았을 때보다 한결 예뻐지신 것 같습니다. 마치 작은 우리 여황폐하를 보는 것 같은데요." 했다. 강쇠의 이 말에 아림은 매우 즐거웠다. 머무르고 싶었던 하루하루는 사정없이 지나갔다. "아이, 날짜가 벌써 다 되어가네..." 아림은 예정위탁기간이 다 되자 위탁기간 연장신청을 위한 통신문을 당국에 보냈다. "숫사람 강쇠의 형질연구를 위한 정보수집이 현재 진행중임. 시각정보, 촉각정보, 후각정보, 미각정보, 청각정보 들의 多重媒體(multimedia) 정보수집을 통해 그의 모든 형질의 구성요소를 분석하여 유전자구조와의 상호 연관성을 假說檢定 방식으로 推論하고 있는 중임. 현재 목표량의 60퍼센트 정도 끝냄. 보다 면밀하고 정확한 조사연구를 위해 대여기간 연장을 신청함." 곧 답장이 왔다. "아림 閤下의 그간의 탁월한 연구실적으로 미루어보아, 충분히 그 만큼의 유용한 연구조사의 결과가 나올 것임이 기대되는 바 위탁기간의 연장을 허가함. 단 사흘 뒤에는 폐하의 수정연습식이 있을 것이므로 혹 복귀를 명하는 일이 있을 지도 모르니 그 이내에 마무리하기 바람." 당국으로부터 연장신청이 받아들여져 사흘간의 위탁기간 연장이 이루어졌다. 열흘째 되는 날 아림에게 다시 전갈이 왔다. "강쇠를 여황폐하가 부르심. 속히 보내주기 바람." 아림은 이 통신문을 보고 시무룩했다. 그녀는 강쇠를 돌아보고는 "어떡하지? 강쇠, 난 너를 보내기 싫은데..." 했다. 강쇠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아직 강쇠는 한창 나이니 여황의 수정식을 위해서는 물론 慰安夫로도 자주 호출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낭패스러운 것은 아림은 이제 다시 강쇠를 부를 명분이 없어진 것이다. 먼저 약속대로 일주일을 데리고 있었고 사흘을 더 연장해 맡겨 주었는데 이제 다시 또 보자는 것은 그 동안 연구조사를 하지 않고 무엇을 했느냐는 의심을 받기 쉽고 여황폐하에게도 누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림에게서 강쇠와의 정분을 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톡톡." 밤중 자기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강쇠는 깜짝 놀랐다. 숫사람들은 모두 세상모르고 자는 이 시각에 누가 자기를 찾아온단 말인가? 그는 문을 살짝 열었다. "아니 웬일이십니까?" "쉬잇." 아림은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조용하라는 표시를 했다. "들어가도 되겠지?" "예, 됩니다마는..." "그럼." 아림은 들어와 앉았다. 그리고는 강쇠를 향해 물었다. "너희들의 생활은 어떻게 지내니? 궁금한데..." "그야, 어릴 때는 저기 궁궐 후원의 양육소에서 멋모르고 자라다가 열다섯 살쯤 되어서 이 곳에 자리가 생기면 들어오게 되죠." "이리 와서는 주로 어떻게 지내는데?"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로지 여황폐하의 성은을 입는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밖에는... 일년에 한번의 수정식이 있고 수시로 수정식 예행연습 즉 위안식이 있지요." "행사는 얼마 정도 계속되는데?" "한 일주일 정도이지요. 예행연습은 너닷새면 끝나고요." "그렇다면, 가만있자... 나머지 기간은 어떻게 지내니?"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너무 답답하잖아요? 어릴 때 양육소에서는 줄곧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자오락기를 가지고 놀았는데 지금도 가끔 하고는 있지만 이젠 갈 데까지 가서 별로 재미가 없어요." "전자오락기? 글쎄 바깥 사회에서도 가끔 보는 것이지만 그래 너희들은 어떻게 하니? 좀 보자." "예, 여기 해 보일 테니 보세요." 강쇠는 방 한 구석에 있는 조그마한 영상기에 연결되어 있는 전자오락기를 켰다. 그러자 곧 우주전쟁 신이 나오면서 외계인 침입자들의 공격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음. 이건 나도 많이 보긴 했어. 내가 먼저 해 볼까?" "해 보세요." 아림은 먼저 자판을 누르면서 오락기를 실행시켜 보았다. 그러나 아림은 가끔 구경만 해 보았지 실제로 해 본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콰광." 곧 아림이 움직이는 전차는 외계인의 폭격에 의해 부서지고 말았다. "제가 해 보지요." 강쇠가 자판을 잡았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반복동작을 계속했다. 강쇠가 움직이는 전차는 외계인의 폭탄투하를 요리조리 잘도 피하면서 외계인의 침략 우주선을 하나하나 어김없이 격파시켰다. 점수판의 숫자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면서 오르더니 곧 보너스게임의 팡파르가 울려나왔다. "야 참 잘하는구나." "아녜요. 이 정도는 저의 동기 숫사람들 중에선 보통이지요. 길동이는 이걸 손에 잡으면 보너스게임을 알리는 소리가 쉴새없이 날 정도인데요. 그나마 요즘은 모두들 재미없다고 안하는 판이에요. 지금 있는 것들은 모두 거둬서 후원양육소로 보내고 새로 나온 오락기들을 곧 마련해 준다고 담당궁인이 얘기하는데 빨리 좀 바꿔주질 않네요. 아마 다음 수정식 가까워서야 될 거라고들 해요." "그 밖에는 뭐 좀 하는 거 없니?" "그리고는..." 강쇠는 담배를 집어 물었다. 그는 아림은 상관 않고 라이터로 불을 붙인 후 연거푸 피워대기 시작했다. 강쇠의 작은 방은 곧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이건 바깥사회에서는 마약법에 의해서 금지되고 일부 불량 일사람들만이 사용하는 것인데... 그런데... 응. 켁켁." 아림은 매운 연기에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강쇠는 별반 개의치 않았다. "저희들이야 필수죠." "강쇠야 내가 있을 때만은 좀 안하면 안되니?" 이렇게 말하며 아림은 강쇠의 손을 꼭 잡고 다가가 그를 안았다. "조금만 참아 줘. 그 대신 내가 너 좀 즐겁게 해 줄게... 여기 찾아오는 사람은 없니?" 아림의 재차 물음에 강쇠는 대답했다. "폐하의 부름이 있어 같이 모두 나가는 일 말고는 아무 일이 없지요. 오더라도 문밖에서 부르기만 하는데, 여기 들어오려 하는 사람은 아림님이 처음입니다." "그것 좀 꺼줘 응." 아림은 강쇠에게 입을 맞추고 자기의 옷을 벗을 시늉을 해 보이면서 다시 부탁했다. "제게 다른 쾌락을 주실 수 있다면야 그럴 수 있죠." 강쇠는 담배를 껐다. "고마와." 잠시 뒤로 물러선 아림은 약속을 지키려는 듯 먼저 한 꺼풀 한 꺼풀 자기의 옷을 훌훌 벗었다. 그다지 보잘 것 있는 몸매는 아니지만 매끈하고 산뜻한 아림의 몸이 다시 드러났다. 가슴은 손바닥 두께 정도 만치 솟아나 있었다. 히프는 여느 일사람보다는 조금 통통하게 벌어져 있었지만 선천의 여인의 그것에는 물론 못 미쳤다. 그러나 허리가 워낙 날씬해 그런 대로 몸매의 균형 있는 조화미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강쇠의 손을 잡아끌고는 구석의 이부자리로 가서 같이 드러누웠다. "그런데 아림님, 전에 연구실에서 보았던 모습이 참 좋던데요. 그렇게 하고 오실 수는 없습니까?" 강쇠는 이전에 아림이 얼굴 등을 치장한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아참 그거.. 그런데 그렇게 하고 다니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는데... 그러면 내가 다음에는 그 화장도구들을 가져올게 그리고 여기서 네가 좋아하는 모습으로 차릴게." "예, 좀 번거롭더라도 그렇게 하시면 제가 더욱 아림님께 성애욕을 가질 것입니다." "그래 네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라면 다 해볼게." 아림은 곧바로 정사를 요구하지는 않고 우선은 강쇠와 같이 얘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또 뭐 하는 거 있니?" "저희 맘대로 할 수는 없지만 수정식이나 위안식을 할 때에는 술이 제공되고 밤새껏 마시며 놀죠. 그리고 숫사람들이 서로 마주보고 모였을 때에는 조각종이(片紙) 놀이를 하죠. 놀이를 하면서 가려면 가고 서려면 서고 하는 거 있잖아요?" "응, 그래 있지. 바깥사회에서도. 그런데 어쩌다 한 두 번 보았을 뿐이지. 그거 하는 건 안 좋다고 해서 하는 사람은 몰래 하고 들키면 손가락질을 받는데 너희들은 괜찮은가 보지?" "저희들이 그걸 안하면 서로간에 만나서 무얼 하겠습니까? 달리 할 얘기도 없고... 서로 어색해지기만 할 거 아녜요?" 아림은 계속해서 이들 숫사람들의 생활을 물었다. 어릴 적 그녀는 한두 번 먼발치에서 엄마와 만나는 숫사람을 본 적은 있는 것도 같았는데 그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지나쳤으므로 이들에 대해 알 일은 전혀 없었다. "아림님 뭐 해주기로 했잖아요?" "아참, 그렇지." 아림은 손을 입가에 대고 잠깐 생각하다가 무슨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듯이 "오늘은 먼저 내 방에서 했던 것보다 더 재미있는 새로운 것을 보여줄게." 하고는 누워있는 강쇠 위에서 몸을 돌려 얼굴을 아래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그의 하부를 열어 젖혔다. 그리고 예전의 이른바 味覺探索을 다시 시작했다. "아림님 절 맛보는 것은 좋은데 제 얼굴을 요강으로 하시려는 겁니까?" 아림의 하체주요부가 면상에 아른거리자 어리둥절한 강쇠가 물었다. "덱... 끼. 그런 뜻이 아냐! 너도 내가 하듯이 해 봐. 그러면 재밌을 거야." 강쇠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아림이 원하는 대로 했다. "어때? 괜찮지?" "예, 좀 묘한데요. 짭짤하기도 하고... 새로운 기분이네요." "그리고 上下主要部同時性感을 느끼는 것도 처음이지?" "예? 무슨 뜻인지요?" "위아래 양쪽이 동시에 즐거운 기분을 느끼게 하는 거잖아? 이런 건 나하고 아니면 아마 느끼지 못할 거야." "그렇긴 한데요. 어쨌든 참 재밌습니다." 밤이 깊었다. 아림도 이제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내일 아침 여기서 출근을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강쇠는 시간관념이 없었다. 아무리 늦어도 이제 그만 가라는 얘기는 없다. 아림은 이 아쉬운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고 싶은 마음에, 초조해 하면서도 좀처럼 일어나지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새벽이 다가오는 丑時가 되어서야 아림은 할 수 없이 자리를 일어났다. "강쇠야. 내일 저녁, 아니 오늘 저녁이라고 해야 되나? 다시 올께." "예, 그런데 제가 자리에 있을 지는 모르겠는데요. 언제 부르심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어쨌든 다음에 또 만나자." 이 때 이후로부터 아림은 일과 후에는 몰래 대신들과 궁인들의 눈을 피해 강쇠의 처소를 찾아가곤 했다. "톡톡" "..." "응, 강쇠 있느냐?" "..." "대답이 없네..." 아림이 그냥 허탕치고 돌아간 날도 많았다. 수정식과 위안식이 있는 날이면 강쇠는 여황에게로 다른 숫사람들과 같이 불려나는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던 강쇠는 곧 습관이 되어 아림의 방문을 자신의 생활로 받아들였다. 특히 해가 바뀌면서 강쇠는 여황의 부름의 횟수가 줄어들게 되자 아림과의 만남의 기회가 자연히 늘어나, 어느 덧 그도 둘의 관계를 즐기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폐하 궁중에 요즘 이상한 기미가 감돌고 있습니다." 귀순마야희고는 궁인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수정식이 없는 날에는 당연히 조용해야 할 숫사람 집단 거처 雄人閣 주변에 밤마다 알 수 없는 수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숫사람들이 뭐 달리 할 일이라도 있겠어요? 필시 다른 외부에서의 잠입이 분명할 것이니 총명한 아림 대신을 시켜 일의 전말을 알아보고 해결하도록 해야겠네요." "예 분부대로 거행하겠사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궁인으로부터의 보고는 아림은 이 일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만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아림 대신은 지금 사회에 외계인의 침입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니 별 개의치 않아도 된다고 하더이다." 귀순마야희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러면 重臣會議를 소집해야겠어요. 오늘 저녁에 모두 불러주세요." 이날 저녁 중신회의가 소집되었다. "요즘 궁중 안에 전에 없던 이상한 기운이 밤마다 떠돈다고 하는데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요?" 여황의 물음에 정보부대신 영화는 호기심에 찬 유난히 반짝이는 까만 눈을 빛내며 우선 답했다. "그건 혹 외계인의 잠입이 아닐까요? 선천시대에 어느 외계인들이 지구를 방문해 지구생물의 대표집단을 만나보려고 했는데, 인간은 덩치도 크고 지구를 물질의 면으로는 지배하고 있었지만 종족끼리의 동포애와 희생정신 등에서는 개미와 벌에 한참 미치지 못해, 외계인들은 어느 쪽을 지구의 대표생물로 인정하여 만날까 자기네들끼리 의견이 紛紛하다가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고 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인간은 모든 면에 있어서 地球의 온갖 生物 중의 으뜸가는 德目을 지니고 있으니 그들이 地球生物의 代表로 두말없이 人間을 指目해 찾아올 法도 합니다. 더군다나 有史以來 類例가 없는 理想의 나라인 우리 아사女皇國의 貴順 女皇 陛下께는 오히려 때늦은 感도 있을 것입니다." 公報部大臣 진아도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어려워하지 않고 陛下를 뵈올 수 있도록 저녁에 宮闕 곳곳에 望을 보게 하여 外界人이 發見되면 서둘러 迎接을 해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림은 이에 對해 말했다. "그것은 요즘의 異常氣候에 의한 大氣層의 不安定으로 體感氣候가 例年과는 다른 現象 때문에 緣由한 것으로 思料되옵니다." 진아는 疑訝한 듯 말했다. "아림대신님답지 않은 말씀이구려... 氣候가 變化無雙한 것은 어느 時代 어느 때라도 흔한 일 아니에요? 전 잘 모르지만..." 暫時 잠자코 있던 새라는 무언가 깨달은 듯 말을 꺼냈다. "여러분 너무 外界人만을 企待하진 말아요. 企待가 너무 크면 失望도 크게 돼요. 外界人이 왔다면 太古적이나 至今이나 이 地球의 삼분의 이인 바다를 평화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고래를 만나러 갔을 지도 모르잖아요? 아마도 우리와 같은 人間이 잠입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되는데요. 지금 지구상에 우리 겨레 우리 나라만 번영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적국으로부터 잠입했거나 그쪽의 사주를 받은 첩자가 숨어들었을는지도 몰라요. 제가 직접 궁궐 곳곳을 살펴 그 진상을 밝혀 내겠어요." 귀순마야희고와 각 중신들은 모두 이의없이 그녀에게 소임을 맡기기로 했다. 다만 아림이 무척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새라는 자신의 근무지로 돌아와 휘하의 황궁 수비대원 스무 명을 불렀다. 그들은 지상에 날아가는 제비를 순식간에 몸을 날려 맨 손으로 잡아 낚아챌 수 있는 정도의 뛰어난 민첩성과, 자신의 거웃 속에 숨어들어 피를 빠는 이벌레를 눈으로 보지 않고 족집어 낼 수 있을 만큼의 예민한 수색능력을 갖춘, 여황국 군사중의 최정예 요원들이었다. "너희들에게 오늘 중요한 임무가 있다." "무엇이옵니까? 새라 大姉님." "내전의 웅인각 주변에 밤마다 수상한 자의 침입이 있는 것 같다. 이는 필시 우리 여황폐하와 평소에 가까이 지내는 숫사람을 통해 우리 나라의 기밀을 빼내어가려는 첩자일 것임이 분명하다. 하루라도 더 빨리 잡아내지 않으면 어리석은 숫사람들에 의해 나라의 기밀이 유출되어 버릴 수가 있다." "오늘밤부터 웅인각의 입구에서 경계를 펼쳐야 할까요?" "그러지 말고 안에 들어와 주요 장소에 잠복하라. 나도 친히 그곳을 감찰할 터이다. 침입자란 예사롭게 침입하는 것이 아니니 경계를 철저히 해야 한다." "예, 분부 명심하겠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황궁수비대는 저녁마다 웅인각의 주변의 담장에 흩어져 매복해 침입자의 출현을 기다렸다. 이 날도 四圍는 자그마한 벌레소리 뿐 적막 속의 긴장만이 감돌고 있었다. "바사삭." 기와담장 위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파박. 턱." 밑에 숨어 있던 대원 하나는 그 소리가 끝나기 조금 전에 담장 위로 튀어 올라 어둠 속에 움직이는 무엇을 붙잡았다. 마치 담장 위에서 난 소리는 잠기어 있던 제동장치를 푸는 소리인 마냥 용수철은 튀어 올랐다. 거의 본능적으로 그녀는 움직이는 생물체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상대방의 동작을 일시에 정지시키며 단번에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 잡힌 것은 커다랗고 억세 보이는 늙은 고양이 한 마리뿐이었다. "캑, 야옹." "쳇 재수 없어." 그녀는 곧 고양이를 내던지고는 사뿐 자기가 있던 자리에 내려와 앉았다. "아. 따분하다." 그녀는 은경이라는 중고참 대원이었다. 계절은 이미 가을로 접어든지 오래지만 이 일사람 군사는 아직 여름철의 옷을 입고 있었다. 워낙 활동적인 생활을 하니까 날이 좀 쌀쌀해도 가뿐한 차림새로 있는 것이다. 단 이번의 밤의 매복작전에서는 어둠 속에 몸이 눈에 뜨이지 않게 검은 긴팔셔츠에 검은 치마 그리고 검은색 스타킹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런 차림새로 가만히 있자니 몸에 한기가 느껴져, 그녀는 조금씩 달달 떨며 어서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기다리고 있었다. 후천의 사회에서는 혹 싸움을 한다 해도 인간끼리의 살상이란 거의 없으므로 일사람 군사로서 자신의 임무수행은 곧 가장 재미있고 보람있는 일 이외의 아무 것도 될 수가 없다. "음. 오줌이 마려운데." 그녀는 한 두 번 두리번 하더니 가만히 앉아 짧은 치마를 손으로 붙잡고 일을 보기 시작했다. "샤아." 그런데 "콩." 곧 그녀의 뒤통수에 알밤이 먹여졌다. 깜짝 놀란 한 그녀가 돌아보니 거기에는 새라가 서 있었다. "앗. 새라대신님 죄송합니다." 당황해서 곧 일어서려 엉거주춤했으나 아직 일어날 수는 없었다. 난처해하는 그녀를 보고 새라는 그녀의 강렬한 목소리를 낮추어 엄하면서도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년 은경아. 볼일 보는 것은 좋은데 가만히 땅위에 바싹 엎드리고 치마로 가리고 보든지 해야지. 어둠 속에 네 하얀 알궁둥이만 들썩이며 빛나니까 멀리서도 다 네가 여기 있는 것이 보이잖아? 모든 일에 항상 철저하게 만전을 기하도록 명심하렸다." "예, 예 큰언니, 조심할게요. 그런데..." 새라는 은경이 일어서기를 기다리지 않고 대답도 다 듣지 않은 채로 가까이 있는 문을 돌아 나갔다. '이쪽은 궁궐과 연결되어 있는 통로이니 침입할 가능성이 별로 없는 곳인데. 좀 적이 나타나기 쉬운 곳으로 옮겨 달라고 하려 했는데...' 은경은 샐쪽한 표정으로 일을 다 본 뒤 몸을 추스려 일어났다. 일사람들은 소변을 자주 보면 활동에 불편하므로 하루에 한 두 번 정도밖에 안 본다. 그 대신 한 번에 걸리는 시간은 조금 길다. 그녀는 자리를 약 이 미터 정도 옮겨서 어둠 속에 자기가 보이지 않게 다시 앉아 매복했다. 조금 있다 새라가 나간 궁궐 쪽의 출입문으로부터 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림자는 이쪽으로 들어왔다. 문을 통해서는 여황의 거처 부근에 밤새도록 밝힌 등불빛이 들어오고 있었으므로 그 사람은 곧 얼굴이 보였다. 다름 아닌 아림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푸른 관복정장 차림으로 퇴청하고 있었다. 은경은 좀 의외라 느끼면서도 앞으로 나가 아림의 앞에서 인사를 했다. "아림대신님. 웬일로 이리로 퇴청하십니까?" "응? 내 숙소 있는 방향이 이 방향이라서 요기만 통해 서문으로 나가는 것이 그냥 동문으로 나가는 것보다 훨씬 가깝거든. 그런데 자네는 왜 폐하의 태화각 주변에 안 있고 이 곳에 있지?" "그냥 요즈음에는 이곳 담장을 지키라고 새라대신님이 그러셔서요. 칫, 그래봐야 여태 고양이 한 마리 밖에 못잡았어요." "그래, 불순분자는 언제 어느 쪽으로 침투할지 모르니까. 어디 담장인들 잘 지켜야 한다. 그럼 수고하련." "예, 안녕히 가세요. 아림대신님." 은경은 총총히 서문 방향으로 멀어지는 아림의 뒷모습을 무심코 보다가 다시 자기가 지키고 있던 자리에 가 앉았다. 밤이 깊어갔다. "아-함." 따분한 그녀는 하품을 했다. 그런데 "욱." 입에 무언가 둥글고 뭉툭한 것이 물려있지를 않는가. 앞을 보니 새라가 자신의 장검을 칼집에 꽂은 상태로 은경의 입 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새라는 곧 칼을 잡아 뺐다. "앗. 죄. 죄송합니다. 새라 큰언니." 새라는 웃으면서 "뭘. 이 녀석아. 그냥 네가 귀여워서 장난 한번 해 본 것 뿐이야. 하지만 언제 단 일초라도 허점을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함은 명심해야 한다. 그래 그 동안 별 기미는 없었냐?" 하고 물었다. "아이, 저도 따분해 죽겠어요. 아까 처음에 고양이 하나 잡아본 것 외에는... 그리고 아림대신님이 잠시 지나가셨어요." "응? 웬일로?" "그냥 이쪽을 통해서 서문으로 나가는 것이 빠르다고 하시던데요." "음?" 새라는 잠시 곰곰 생각했다. 그리고는 은경에게 이르기를 "은경아 담장만 지키지 말고 안마당을 훑어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있나 찾아보아라. 그리고 침입자가 발견되거든 곧바로 잡지 말고 그자가 불순한 행동에 들어가고 난 뒤 나의 명령에 따라 체포해라. 동료대원들을 만나면 걔네들에게도 그렇게 전해 주고." 라고 한 뒤 어서 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예? 침입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요." 은경이 어리고 순진해 뵈는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우주인이 눈에 보이게 오냐? 그들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알지 못하게 올 수 있어. 단지 그들이 여기서 일을 꾸미려면 우리에게 들리거나 보이지 않게 행동하기는 힘들 거야. 그러니 그냥 하라는 대로 해봐." "예 물론이죠. 그냥 궁금해서 한번 물은 거예요." 은경은 따분한 일에서 해방되어 즐거운 듯 한번 거수경례를 붙이고는 웅인각 건물이 있는 앞마당으로 사뿐사뿐히 걸음을 옮겼다. "귀여운 것." 새라는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슬며시 혼자 미소를 짓곤 다시 그 자리를 떠나갔다. 은경은 가다가 웅인각 한 귀퉁이에서 나는 뒤치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응? 웬 소리가... 저기는 지금 이 시간에는 아무 소리 없이 조용해야만 할 곳인데..." 담벼락을 따라 늘어서 있는 정원수 사이를 살금살금 지나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그녀는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 때 어둠 속으로부터 갑자기 튀어나와 은경의 목을 덥석 움켜쥐는 黑衣人이 있었다. "크억." 은경의 몸은 그와 같이 나뒹굴었다. 그러나 곧 서로 얼굴을 알아보자 그는 은경의 목에서 손을 놓았다. 흑의인은 다름 아닌 동료 대원 수연이였다. "쳇, 재미있다 말았다. 은경아. 왜 맡은 자리를 떠나서 이리로 오는 거니?" "켁, 아니, 대자님이 우리보고 안마당을 수색하라고 하셨어. 지금 수상한 소리가 나는 곳이 있어서 가고 있는 중이야. 너희들도 같이 수색하라 하셨어." "그래? 그럼 찾아보자. 그러잖아도 좀 이상한 낌새는 나도 느끼고 있었는데... 지키는 것보담 훨씬 재미있지." 은경, 수연과 다른 대원들은 웅인각 한 귀퉁이에서 나는 수상한 소리를 따라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들어 갔다. 그들은 귀퉁이의 한 방에서 나오는 나지막한 속삭임을 들었다. 일고여덟 명의 대원들은 소리없이 살랑살랑 튀는 발걸음으로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모여들었다. 일동은 긴장 속에 숨을 죽이며 동태를 살폈다. 새라도 어느 사이에 이 곳에 와 있었다. 이렇게 하여 새라의 일행은 마침내 이 날 아림의 정사현장을 잡아내기에 이르렀다. (19) 超女의 恨 귀순마야희고는 각부 대신들과의 다망한 궁중생활 중에 또다른 자신만의 일과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아니 일과라기보다는 자신의 외로운 마음을 스스로 달래주기 위한 방편을 찾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녀의 여황국이 갈수록 번창하고 백성들의 尊仰을 받는다 해도 본질적으로 하나의 여자, 그것도 오랜 시간의 흐름을 거친 진화에 의해 극단적 女性이 강조될 대로 강조된 여자인 후천의 지배자 여황족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선천의 여자와 다를 바 없이 행복을 위한 그녀의 바램은 역시 사랑 받음이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녀는 혼자 공상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면서 그녀는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신의 이상형의 남자를 그렸다. 그녀는 공상을 자신의 잠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밤마다 잠자리에서 그녀는 자신의 환상 속의 연인을 만났다. 꿈속에서 그이는 저 산너머에서 그녀를 손짓하며 오라 하고 그녀는 그이에게로 달려가 그이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는 그 품에 안긴 채 사랑의 열기가 일어날까 하는 즈음 그녀는 번번이 깨어나곤 했다. 잠에서 깨어 날 때마다 헐떡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때로는 커다란 서운함과 배신감에 울먹이는 그녀는 영문을 모르는 기상식 집전관 등 궁중 일사람들에게는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폐하의 건강을 자세히 검진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그녀는 "아냐. 괜찮아. 필요없어요." 하고는 사양하지만 이런 문제만은 정말로 그녀 스스로의 뜻대로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조금 부끄러우시다고 그러시면 아니되옵니다. 모든 백성의 행복이 달린 폐하 아니십니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건강검진을 받았다. 그러나 정밀 신체검사 결과 그녀의 건강은 아무런 異常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종합건강담당 御醫는 말하기를 "그것 봐요. 처음에 폐하의 이 부끄러워 상기된 혈색을 보아도 폐하의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증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보세요! 폐하의 이 아름다운 홍조를! 건강에 이상이 있으시다면 이토록 고운 빛깔은 나지 않는 법이에요." 하고는 젖은 눈을 한 채 멍하니 있는 귀순마야희고를 보며 "공연히 불필요한 수고를 끼쳐드렸군요. 황공하옵니다." 하고 모두를 대신해 謝拜했다. 그러자 이 때 한마디 異意를 제기하는 다른 어의가 있었다. "아닙니다. 폐하의 건강은 이상이 있습니다." 모두들 놀라 고개를 발설한 어의에게로 돌렸다. 말한 이는 작은 키에 다부진 체격의 순이라는 정신과담당 어의였다. 그녀는 둥그스름한 얼굴을 무표정한 채로 두면서, 눈을 조금 치켜 뜨고 계속 말하기를, "육체 곧 폐하의 성체의 건강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폐하의 聖心의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입니다." "..." "폐하는 지극히 정과 사랑에 주리고 계십니다. 인간이란 육체를 통한 들고나 감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듯이 정신에 있어서도 그리해야 하는데 폐하는 마음의 주고받음이 심히 불균형상태에 있읍니다. 너무나도 다정다감하신 폐하께서는 당신의 신하와 백성을 끔찍이도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신 스스로께서는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들 해 드려야 하겠소?" 모든 어의와 참관 대신들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황공하옵게도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그저 우리로서 할 수 있는 온갖 정성을 다해 보살펴 드리는 것밖에..." 아무런 구체적인 방안은 제시되지 못했다. 단지 그 이후부터 궁인들을 비롯한 일사람들은 그들의 여황이 혹 외로울까봐 더욱더 그녀 주위에서 떠나지 않고 마음써 모시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차도가 없이 매일같이 그대로 반복했다. 이제는 일사람들도 그냥 버릇이거니 하고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밤마다 자기의 사랑의 꿈을 꾸었다. 그이의 이름은 반야라 했다.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신앙처럼 언젠가는 그이가 자기에게 현실로 나타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이를 생각하며 기다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일상을 사는 것이었다. 밤마다의 그이와의 만남의 시간에 그녀는 자기의 참마음을 어떻게 잘 전해 줄까 생각했다. 그녀 摩耶는 날마다 궁중의 일과가 끝나는 오후부터 해질녘까지 잠자리에서 만날 그이를 기다리며, 자신의 몸을 베틀 삼고 긴 손톱의 손가락들을 바디로 삼아 자신의 옷 이외에 그이의 옷도 하나 스스로 베를 짜서 지었다. 해는 기울어 노을빛이 귀순마야희고의 거실에 스며들어 그녀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어도 그녀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일에 빠져든 채로 있다. 저녁 戌時가 되어 그녀가 잠자리에 들을 시간이 다가왔다. 그녀에게 취침시간고지담당 궁인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귀순 여황폐하 이제 잠자리에 드실 시간입니다." 그러나 귀순마야희고는 한 번에 그 말을 듣고 알아채지는 못한다. 자신의 일에만 열중하기 때문이다. 그 일은 자신의 마음속을 곧 꿈속에서 뵈올 그이에 대한 幻影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와서 흔들어 대자 그녀는 비로소 알아챈다. "응, 알았어. 이제 잘 준비를 하지요." 그녀는 베 짜던 일을 정리하고 그녀의 침소로 향했다. 침소에 도착하니 침상의 주위에 미리 와서 도열해 대기하고 있던 취침준비 담당관 일행과 취침식 집전관일행이 자세를 가다듬어 그녀를 맞이한다. 아직 황복을 입은 채로 있는 그녀가 침상 옆의 난간에 한 팔을 짚고서 다소곳이 앉아 자세를 취하니 취침준비 담당관 일행중의 한 명은 그녀의 앞가슴에 묶인 매듭을 풀어 그녀의 황복을 열어 젖힌다. 그리고 옆의 담당관은 그녀의 옷소매를 잡아당긴다. 청실, 홍실의 줄기에 금은꽃이 어우러진 넝쿨이 백옥의 절벽을 미끄러져 내린다. 다시 한 팔을 짚고 다른 팔을 내미니 나머지 한 소매도 젖혀져 미끄러져 내렸다. 또다시 그녀는 수줍은 나신이 된다. 하룻동안의 일과를 마친 그녀의 모습은 아침의 모습보다는 잔잔한 평화가 어린 듯 하다. 곧이어 그녀의 잠옷이 위에서부터 씌워진다. 담당관 둘이 작업대를 딛고 올라서 잠옷으로 그녀를 덮어 내리고 양쪽의 어깨끈을 묶어 그녀에게 잠옷을 입히는 절차를 마친다. 그녀가 침상에 눕자 곧 취침식의 집전관 일행이 아사녀황국 여황 귀순마야희고의 성스러운 하루의 생활을 마무리하는, 경건하기 이를 데 없는 취침식의 집전에 들어간다. 그들은 귀순마야희고에 대한 자장가의 奉唱으로써 취침식을 삼는다. 우리마마 삼기심은 사랑받기 위함일새 우리臣僚 한결같이 님을위해 몸바쳐도 님에게서 받은恩德 만분지일 못갚으니 님을위한 사랑바침 人力밖의 일이로다 님이시여 오늘밤은 사랑단꿈 얻으시어 人間에서 못한사랑 靈界에서 얻으소서 선천, 후천 어느 하늘 아래서의 인간이던 간에 시인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인가. 그녀가 사랑에 주려 외롭다는 사실은 감성 있는 자라면 알 수 있는 것이기에 궁중시인은 그녀에게 이러한 자장가를 지어 바쳤다. 시인은 이의 해결을 위한 현실의 책임은 지지 않는다. 그들의 존재근거가 되는 것을 소멸시킬 이유는 없다. 단지 그 사랑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막연한대로, 잠 속에서라도 사랑의 위안을 그녀가 얻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귀순마야희고는 노래를 다 듣자 곧 잠이 들었다. 취침식 집전관 일행은 곤히 잠들어 있는 그녀를 향해 재배하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물러나왔다. 마야는 이름 모를 꽃들 만발한 산 정상의 高原 위에 서 있다. 날은 맑고, 눈부신 하늘에는 흰 뭉게구름이 여기 저기 떠다닌다. 바람은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게 한결같이 불어 와 그녀의 얇은 옷자락을 나풀거리게 한다. 멀리 구름이 하나 둘 걷히면서 어느 덧 저 앞의 봉우리에 반야의 모습이 보인다. 그 얼굴의 모습은 또렷하지 않다. 그것은 멀리서부터 그녀를 휘감아 오는 사내의 짙은 기운이다. 그녀의 님은 다가온다. 마야는 진종일 기다림의 한이 풀리는 벅찬 마음에 그의 있는 곳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달려가 와락 그의 넓은 가슴에 안긴다. 그이의 굳센 팔의 압박감이 그녀의 몸에 강한 抱擁壓을 주어 그녀를 숨결을 불규칙하게 한다. 그이의 품안에서 숨가쁜 사랑의 희열을 느끼는 그녀의 체온은 상승한다. 헐떡이는 그녀의 몸의 긴장은 계속 고조되다가 兩氣의 合一이 되는 것인가 어느 순간 일시에 풀어지며 그녀는 깊은 사랑의 아득한 심연에 내맡기어져 하염없이 빠져든다. 그녀는 다시 새근새근 고운 꿈을 꾸며 잠자는 평화스러운 모습이 된다. 그이와의 만남과 달려감, 안김 그리고 그 품에 깊이 빠져듦 들이 반복된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이와의 사랑의 열락에 들어가려 할 즈음 그녀의 단잠은 끝난다. (20) 女皇의 落淚 諸生無常. 그 옛날 한 때 지구상을 지배했던 중생대의 공룡은 우직스러운 巨大指向의 定向進化만을 거듭하다 환경의 변화무쌍함을 이기지 못하고 멸망했다. 이후 새로이 번성한 생물 중에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며 지구상의 森羅萬象 모든 것들을 자연의 허락없이 소유하면서 無所不爲의 지배권을 휘둘렀던 前生代의 남자들도 발빠른 환경적응과 경쟁우위의 정향진화로만 치닫다가 역시 그로부터의 모순으로 몰락했다. 올곧은 女性指向의 그녀들 女皇族도 귀순마야희고에 이르러 고비에 다다르는가. 품에 안겨 사랑 받고자 함은 갈수록 더해만 가니 풀지 못할 恨은 지녀야 할 숙명으로 남는가. 아림과 같이 性에 눈뜬 일사람이 계속 나와서는 숫사람과 같이함이 세상 부귀영화 무엇보다 행복하다 알게 된다면 그네들은 女皇族을 버리고 저들만의 삶을 도모할 것이다. 그리하면 훗날 그네들 凡人族의 사회에서는 女皇族의 이야기는 여인의 맺힌 한이 스며있는 아득히 먼 傳說로 내려오는 옛 神話로만 남아 전해질 것이다. "쿠르릉. 쾅." 화자이자나미는 가까이 크게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오후의 선잠을 깼다. 손에는 아직도 읽고 있던 커다란 붉은 책을 들고 있는 채 였다. 어느 덧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밖을 쳐다보니 한 무리의 차량행렬이 들어와서 모황의 거처인 태화각을 향해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그네들의 분위기는 그렇게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읽었던 책을 다시 고쳐 잡고 나머지 부분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다시 책에서 전개되는 내용은 그녀가 방금의 꿈속에서 어렴히 본 듯 했다. 밖의 행렬은 다름 아닌 범법자 아림의 죄인 호송 행렬이었다. 아림은 법의 절차에 따라 곧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재판관들은 그녀의 진술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凡人의 思考로는 도저히 판결이 불가능할 것이며 또한 여황의 측근대신의 범죄이니 결국 上의 판결을 받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고 결정된 것이다. 넉 대의 무륜저상차는 태화각 앞에 멎었다. 그리고 그 중 한 대에서는 아림이 회색의 죄수복 차림으로 병사들의 호송을 받으며 내렸다. 모두는 태화각내의 어전회의장으로 향했다. 일전에 여황 귀순마야희고의 총애하던 인재로서 여황국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긴 바 있던 학부대신 아림은 귀순마야희고의 어전회의장에 끌려와 심판을 받게 되었다. 어전 회의장엔 군부대신 새라와 정보부대신 영화 등 주요 대신들이 죄인 아림을 꿇어앉히고 도열하여 귀순마야희고의 입장을 기다렸다. "폐하 자비를 베푸소서..." 아림은 여황이 아직 나오지 않은 것도 알지 못하고 연거푸 고개를 조아려 용서를 빌고만 있었다. "궁." 前面의 옆자리에 세워 있는 해바라기 모양의 북이 저절로 울리면서 주위를 喚起시켰다. 곧이어 여황의 입장을 알리는 어전 담당관의 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慈悲英明하신 대쥬신 아사녀황국 귀순마야희고 폐하의 입장이오." 잠시 후 주위에는 스며드는 자욱한 안개처럼 여인의 진한 향기가 퍼져들어오더니, 인간의 미와 신의 덕을 두루 갖춘 半神半人 대쥬신 아사녀황국 여황 귀순마야희고가 그녀를 받치고 있는 용상수레와 함께, 芳香玉體 주위의 後光같은 女香을 풍기며, 대신들이 늘어서 있는 곳 앞의 금실 수놓은 짙붉은 揮帳이 천장 가득이 드리워진 곳에 소리없이 미끄러져 들어와 자리ㅎ다. 그녀가 등장하자 그녀의 숨결과 체온이 온 어전의 분위기를 감싸안았다. 어전의 실내온도와 습도는 어느 정도 올라갔음이 틀림없었다. 청홍 무늬 수놓은 피륙이 金欄干에 둘러싸여 있고, 아래에는 붉은 布가 사방으로 둘러쳐져 있는 침상에 모로 누운 그녀의 몸에서는 생명의 기운이 쉬임없이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公事를 위한 범인족의 접견이라도, 자기의 몸이 보여지는 것이 심히 부끄러워 얼굴이 발그레 상기되는 그녀 極端女性 귀순마야희고. 청실홍실 짜여 있는 그녀의 황복은 촉촉한 습기 나는 그녀의 살갗에 신선한 바람이 쉬이 닿게끔 옥그물 마냥 성기게 짜여져 있고, 색실의 매듭마다에는 금고리, 은고리, 비취구슬, 호박구슬 들이 형형색색 서로가 제 모양새를 뽐내어 견주듯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것들의 사이사이 엿보이는 그녀의 軟黃白 살결의 빛남에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인간으로서의 존귀함과 아름다움이 가히 그 극에 달하여 정말이지 여향에 대한 면역 없는 선천시대의 여느 남자가 그녀를 마주한다면 미처 가까이 가기도 전에 그의 숫기능은 팽팽히 달아올라 터져 모조리 결딴 나고야 말게 할 그녀. 용상이 정지하자 그녀는 팔을 짚고 가만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가 자세를 잡자 두 젖무덤이 한동안 출렁이고 젖꼭지가 흔들렸다가 그녀가 이를 알고 적이 부끄러워 냉큼 한 쪽 팔로 덮어 누르니 곧 멎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죄인은 바로 그녀의 애틋이 사랑하는 딸 아림임을 알게 되었다. 당혹한 마음이 앞섰으나 지금 이 자리는 여황국의 공사이다. 사사로운 마음을 내색하는 것은 아니된다. 귀순마야희고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물었다. "아림의 죄명이 무엇이오?" 귀순마야희고의 玉音이 發하자 어전의 사방에 드리워진 커튼이 부르르 떨었고 창문이 덜컹거렸다. 그러나 바깥의 세찬 빗소리 때문에 그다지 현저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녀가 말하는 중에 실내의 온도와 습도는 더욱 높아지는 것 같았다. 앞에 위치한 대신들의 면전에는 그들의 얼굴을 달구는 濕溫風이 스쳐지나갔다. 새라가 이에 대답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大逆 謀叛罪입니다. 나라의 기밀을 빼돌려 외국에 유출하려는 모의를 하다가 어제 체포되었나이다." "무엇으로 모반죄라 할 수 있소?" 걱정스런 눈빛으로 재차 묻는 귀순마야희고의 얼굴에는 그러면서도 충성스런 대신의 마음을 헤아리는 인자한 미소가 감돌았다. "폐하께서 근자에 가장 가까이 하옵시던 숫사람 강쇠의 처소에 까닭없이 잠입해서, 그와 밀착해 밀담을 나누는 현장을 덮쳤사옵니다." 아림은 이에 대해 용상을 올려보며 간절히 호소했다. "아니옵니다. 소신은 단지 두 사람 사이의 정담만을 나누었을 뿐입니다." "죄인 아림은 잠자코 있지 못할까!" 대신들은 아림의 말을 가로막았다. "폐하 반역죄입니다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 군부대신 새라는 강경하게 진언한다. "반역의 목적 이외에는 그런 불필요한 僭行을 저지를 이유가 없습니다." 아림은 다시 울면서 호소한다. "폐하 반역의 뜻은 전혀 없사옵니다." "소신은 단지 숫사람에 안기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이 말에 새라는 더욱 크게 소리내 죄인을 윽박지른다. "웬 눈물인가? 감히 폐하의 흉내를 내다니!" 정보부대신 영화도 아림을 향한 힐문과 함께 의견을 말한다. "그게 무슨 목적이 있는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행동이란 말인가?" 영화는 고개를 귀순마야희고를 향해 돌리며 "이는 필시 폐하와 가까이 지내는 숫사람을 통해 우리 나라의 기밀을 탐지해 적국에 유출하려는 반역의 의도임에 틀림없습니다. 숫사람들은 단순하여 이 자의 말만을 듣고 어떤 利敵性의 정보 유출을 도와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림을 안경너머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새라는 문 가까이 대기하고 있는 부하를 불러 준비했던 것을 가져오라고 했다. 곧 그녀에게는 조그만 상자가 주어졌다. 새라는 이 상자 안에서 물건 두어 개를 꺼내 보이었다. "보십시오. 이 죄인은 이런 요사스러운 물건들을 만들어 가지고 감히 폐하의 모습까지를 흉내내려고 했습니다. 강쇠에게 물은 바 그와 가까이 할 때마다 이것들을 가지고 자신을 마치 폐하의 모습 마냥 보이게 꾸미곤 했다 하옵니다." 안의 물건들은 하나는 손가락 만한 원통으로 생겼는데 그 안에서는 붉은 막대가 들락날락 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작은 병 속에 빨간 액체가 있고 뚜껑에는 붓이 달려 있는 것도 있었고 원반형의 갑에 뚜껑을 툭툭 치면 가루가 날리는 것도 있었다. "자기 얼굴에다 그림을 그리는 크레용과 물감과 분가루이군."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저런 이상한 물건을 만들어서 자기 모습을 우리 여황폐하 마냥 보이게 하려고 애쓸까?" 조금 멀리 있던 하급 신하들도 이 광경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군수군 했다. 여황 귀순마야희고는 한참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아림을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한 원인은 그녀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에 대한 마음의 충격을 이 자리에서 나타낼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녀는 갑자기 참지 못한 마음이 터져 비오듯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흐르는 눈물은 그녀의 가슴까지 흘러 내려와 뚝뚝 떨어져 침상을 적셨다. 그리고는 곧 낮은 울음소리로 이어졌다. "어흐, 흑흑." 어전의 바닥은 서있는 자의 다리를 후들후들 떨리게 하는 저주파의 진동으로 가득했다. 그것은 잡혀오게 된 아림에 대한 연민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룰 수 없는 꿈을 현실에서 가지는 아림에 대한 질투심 섞인 부러움이었다. 그것은 기약 없는 오랜 기다림의 외로움에 지친 그녀의 감정을 북받치게 했다. "우르릉. 쾅." 천년만년 변함없는 천둥소리가 다시 가까이서 울려왔다. 그와 함께 늦가을의 장대비는 모란성의 장대한 누각들을 흠씬 적시면서 더욱 쏟아져 내리 퍼부었다. 내린 빗물은 어느 덧 도랑이 되어서 누각들의 기둥사이를 세차게 돌아 흘러 내려갔다. 갑작스런 여황의 울음에 도열한 대신들은 잠시 침묵했다. 여황의 울음이 드문 일은 아님은 그녀를 가까이 보좌하는 중신이라면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터져 나오는 것은 조금은 뜻밖이었다. 귀순마야희고는 오래지 않아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청아한 목소리로 그녀의 판결을 界面調의 저주파음에 실어 낭독했다. "광혜 250년, 대쥬신 아사녀황국 여황 귀순마야희고는 죄인 아림에게 告한다." "대쥬신 아사녀황국 여황 귀순마야희고의 자비로 반역자 아림에게 그의 情夫와 함께 星外 추방령을 내린다." 신하들은 앞 다투어 극력 진언한다. "폐하 아니되옵니다. 극형에 처하심이 마땅한 줄로 아옵니다." "폐하의 자비도 미칠 곳이 따로 있사옵니다." 귀순마야희고는 앞을 가리는 눈물의 흐름에 무거운 손을 들어 시야를 훔쳐내면서 모두를 둘러보며 "그대들의 衷情은 이해하나 짐은 이 죄인으로 인해 여황국을 다스림에 크나큰 반성의 계기를 얻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이 사건의 의미를 두고, 이에 따라 그녀를 방면키로 하였노라. 차후 여황족의 후예는 성년이 되어 독립하기 이전까지는 일체 범인족과의 신체접촉은 물론 대면도 금한다. 아림은 이제 두 번 다시 이 지구상에 나타나지 말도록 할지어다." 하고는 다시 고개를 내려 얼굴을 용상의 바닥으로 향했다. 수북한 머리칼이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아림은 부복하여 조아리며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폐하의 자비에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여황 귀순마야희고는 고개를 서서히 안쪽으로 돌리면서 "사랑하는 나의 딸아 어서 가거라." "부디 행복하여라" 하고 마지막 옥음을 발하더라.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다. 아림은 병사들에 의해 끌려나갔다. 나가면서 그녀는 갑자기 돌아서서 "어머니!"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 소리는 격한 폭우와 천둥소리에 가려 들리지 않았다. <끝> 作者 後記 책을 출간하게 되면 의례 받는 질문이 다음 작품을 어떻게 구상하느냐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책을 냈다는 것은 곧 소설가로서의 입문을 뜻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위사람의 기대이기 앞서 글을 쓴 자의 당연한 바램이기도 하다. 이 원고를 다 마치고 나서 그 동안 대강 구상하고만 있었던 다른 글을 쓰기 시작해보려 했다. 그런데 생각처럼 잘 써지지를 않는다. 사실 누가 먼저 주제와 줄거리를 주고 그에 따라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쓰라 한다면 그런대로 쓸 수 있겠다. 그러나 나만의 새로운 창작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이 물론이고 또한 뜻대로 노력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돌이켜보니 이제까지 어떻게 해서 이런 이야기를 써내려 왔는가 스스로 의아하기도 하다. 분명 이것은 내가 쓰고자 해서 내가 바라는 시기에 쓰여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간 내 주위를 떠돌며 나타날 시기만을 엿보고 있었던 <기록자>와의 운명적 만남에 의해서가 아닌지. 이 이야기의 실마리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십여 년 전 우연히 구입한 작은 책에서 우리 古來의 마야고의 신화를 보았다. 그것을 읽고 우리의 신화도 그 의미의 발굴작업을 더하면 충분히 그리스 로마 신화 등과 같이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고, 당시에도 언젠가 한 번 이것을 문학 작품으로 구성해 봤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 뒤로 십여 년 간을 마야고를 잊고 살아오면서도 나는 언젠가 글쓰기를 하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랬었기에 글쓰기로의 입문이 더욱 늦어졌는지도 모른다. 내가 세상에 내놓고 싶은 글의 실체는 막연했던 것이다. 나의 지나간 연애사를 쓴단 말인가? 그런 넋두리를 들어줄 만치 현대인은 한가하지를 않다. 어쨌든 나는 무엇을 써 내보일 것인가는 정해지지 않은 채로 언젠가 나의 글을 세상에 내보내려는 마음만을 먹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우연한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었다. 컴퓨터통신이 보편화되면서, 본래 컴퓨터관련 직종을 가지면서도 컴퓨터통신을 즐겨하지 않던 나도 컴퓨터통신을 접하게 되어 글쓰기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인간사의 거시적인 흐름의 관점에서 보면 필연을 위한 한 수단적인 배경에 불과하리라. 원고도 거의 완성되어 갈 때쯤 우연히 방 한구석에서 십 년이 넘게 오래된 스케치북을 먼지가 잔뜩 묻은 채로 발견했다. 거기에는 방황하는 젊은이의 심정을 반영하듯 거친 필치로 그저 가상의 여인의 모습들을 스케치해놓은 것들이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나는 전혀 잊고 있었지만 그 그림 중에는 한 여인이 호젓한 동산 위에 엎드려 누워 풀내음을 맡는 모습이 있었던 것이다. 이미 글에 묘사했던 그 장면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그 오랜 이전부터 마음속에 잠재되어 그 具現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몇 년 전쯤 언제부터인가 내게 떠올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밝혔던 여성관이 있었다. 일벌 중의 선택받은 하나가 로얄젤리를 받아 여왕벌로 날아오르듯이, 나는, 기성의 여인 됨됨이에는 그다지 구애됨이 없이, 나의 선택될 여인에게 풍부한 마음의 양식을 주어 그녀를 마음의 여왕으로 만들고픈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여성에게 하등의 매력을 주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이 시대의 여성들의 바램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뭇 여성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발빠른 환경적응에 의한 집단 내 생존력의 시험일 뿐이었다. 나의 말을 들은 어느 친구는 '그 <로얄젤리>를 미리 내놓으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아랑곳없이, <로얄젤리>를 기꺼이 받을 누구만을 기대해 왔다. 기록자가 나의 주위를 맴돌면서 간간이 일어나던 이러한 동기 현상들이 제각기 따로 별개로 영글어 오다가, 지금 비로소 때를 맞아 <기록자>를 마주하게 되어 결집된 것인가 한다. *